brunch

비화에서 연화로: 새로운 세계에 보내는 믿음

by 수차미

오타쿠 중에 시네필이 많다는 말은 사실일까. 언뜻 봐도 틀린 문장이지만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애초에 오타쿠나 시네필을 두고서 서로 단어를 정의하는 법이 다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모두 좋아하는 사람은 눈여겨볼 만하다. 밀레니엄 시네필 중에서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모두 좋아하는 이가 적지 않다. 단순히 젊은 세대에 서브컬처가 보편화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무언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거에는 자신이 정확하게 무언가에 ‘속한다’는 인식을 갖고 살아갔다면 오늘날엔 비교적 희미한 존재감으로 살아간다. 21세기가 거대서사의 죽음을 겪은 세기라면 이 시대는 개인이 곧 서사가 되는 시대다. 사람들은 소속감을 중요시하기보다 이야기를 가꿔가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마땅한 소속이 없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있지 못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절망한다. 이 과정에서 정의론이 발동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정의하려는 힘이 이동하거나 말하는 등의 여러 행동에 동인이 되어준다. 핵심은 그런 시도가 끝내 목적에 닿지 않기 때문에 이 행동이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음을 건네고,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아 헤매면서 사막 어딘가를 걷는 이가 있다. 이따금 당신은 삶에 지쳐 이 세계에 ‘소화’되고 싶지만 자아는 삼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릴 뿐, 존재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이런 점이 특정한 세계에 소속되기보다 여러 잡음 안에 섞이기를 선호하게 했다. 중심이 없는 게 아니라, 변방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는 운동 자체가 자아를 규정하는 게 된 것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모두 좋아하는 일은 언뜻 보았을 때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시간을 토대로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점뿐인데 무언가 뾰족한 공통점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현실에 가깝고 애니메이션은 가상에 더 가까우니 둘을 한 자리에 두기란 어렵다. 영화는 그러니 왜?라는 물음이 드는 것도 몹시 당연하다. 현실주의자가 갑자기 꿈을 찾아 홀연듯 떠나기라도 한 걸까? 아마도 다음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취향이 더 넓어졌거나 아니면 두 매체가 서로 닮아가는 경우다. 양쪽 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둘 중에서는 후자를 더 살펴보고 싶다. 영화가 상상적인 매체로 변해가고 반대로 애니메이션이 영화의 진솔함을 닮으려 한다면, 이들 간에 서로를 지탱하는 건 무엇일까.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는 동적인 것에 대한 선호가 있다. 영화가 움직이는 사진이라면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만화다. 이를 따르면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으니, 특정한 세계가 아니라 활인화 자체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밀레니엄 시네필에게는 이 둘이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을 듯하다. 밀레니엄 시네필의 특징은 체스의 폰처럼 앞으로 나아가 다른 기물로 승급하기만을 바라는 게 아니라 나이트나 비숍처럼 변칙적인 움직임을 선보인다는 점에 있다. 이전과는 다른 세대로서 이들을 구분짓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아니라, 도주의 자유분방함을 언급해두고 싶다. 이전에는 앞으로 달려나가는 게 표준이었다면 오타쿠의 ‘도주’는 탈주에 가깝다. 오타쿠는 과거의 히피와 같은 저항세대에서 산포의 행위를 물려받고, 반대로 세계는 물려받지 못한 존재다.


20세기엔 분명 ‘바깥’이 있었다. 21세기가 되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념할 만한 세기의 사건 같은 건 없었다. ‘대폭발’은 없었다. 이를 기점으로 ‘바깥’에 대한 생각은 대격변 비스름한 것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영유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동시에 거대서사에 대한 인기도 시들었고 선과 악을 필두로 한 이분법도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악당은 악당답게, 주인공은 선하고 멋지게만 그리는 게 아니라 인물의 모습에 각각 개성을 부여하고 그 안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전에는 한 세계에 사람들을 가두어두려 했다면 오늘날에는 개인이 모두 하나의 세계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갇혀있던 내부에서 열린 외부로 나아가면서 ‘미래’를 한껏 받아들이려 한다. 여기서 ‘미래’는 세계의 천장이 아니라 거대한 ‘바깥’으로서 특정한 한계를 두지 않는다. 개인이 써내려가는 이야기의 양상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이 세계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를 고민했다면 오늘날에는 이 세계에서 자신을 만나는 건 어떤 의미인지를 고민한다. 과거에는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상한선이 명확했으니 땅에서 천장에 이르는 만큼 자신을 높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특정한 사건이나 경험 등이 없으면 자기를 상대화하기가 어려워 사람들은 자기를 말하고자 여러 경험들을 해보려 한다. 타인의 우주와 세계를 넘나드는 건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단순히 방황하며 무소속과 미지를 즐기는 게 아니라 다시 만날 ‘세계’로 나아가려 했다. 사람들은 이 세계가 위치를 바꾸지 않고서도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지금 이 삶의 ‘바깥’이 아니더라도 작금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의 과거가 ‘위치짓기’에 관심 있었다면 오늘날은 ‘조우’에 관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매체가 자신에 숨겨진 힘을 발견하거나 어떤 혈통의 소유자임에 방점을 뒀다면 21세기 매체는 무엇이 현재를 바꿀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사람들은 특별해지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며 어떤 경우에는 그 경험이 ‘특수’했으면 좋겠다고 여긴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삶을 극적으로 바꾸는 특수한 경험 같은 건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을 이 세계에 재배치하고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서브컬처의 부흥은 그렇게 보이는 감이 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서브컬처는 개인이 흥미요인을 발굴해 이를 특정 서사로 엮어가는 ‘모에’를 가리켰다. 이 안에서 ‘나’란 특정한 무언가가 아니라 여러 것들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다양한 것들을 조합하고 배치해가는 과정에서 이를 선택하는 동인이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소위 취향이라고 말하는 게 대두하면서 개인의 선택에 힘이 실린다. 오타쿠란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해가는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다. 무언가를 선택함으로써 그에 머무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선택의 과정 자체를 반복하는 일을 선호한다. 누군가에게 ‘선택’을 반복하는 건 단순히 미완의 존재임을 말할 뿐일지도 모르지만, 이들 오타쿠는 그러한 반복이 삶을 지속하는 원리라고 믿는다. 이 점에서 오타쿠는 어른이라는 단어와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어른은 성장이 완료돼 ‘이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기의 미성숙함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마련된 연화이고 관계의 분화는 순간성에 대한 비화이다.


그러니 오타쿠를 두고서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말하는 건 타당하다. 오타쿠는 상상에 맞닿은 존재로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가며 추구하는 안정성 등은 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오타쿠의 최애는 시종일관 변화의 국면에 있다. 오타쿠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 세계가 완고한 하나가 아니라 여러 이야기가 교차하는 곳이라는 걸 잘 안다. 오타쿠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 세계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는지를 줄곧 고민하고, 의미의 연결망을 탐험하면서 인간의 관계를 차분히 살펴나간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오타쿠는 의미를 연결하는 존재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사실은 어떠한 관계 안에서만 설명되는 존재일 뿐이다. 특히 오타쿠 문화에서 관계성의 의미는 크다. 우선 오타쿠문화는 X와 같은 SNS나 팬덤 등의 교류와 관련이 깊은데 이는 오타쿠 문화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나’를 발견하는 일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점점 다른 의견을 내기 힘들어진다거나 하는 문제는 있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멀리서 바라보던 이들이 점점 이야기 안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은 이 세계가 점점 영화화되어가는 것처럼도 보인다. 시네필의 가장 큰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세계에 대한 믿음’이니 말이다. 중요한 건 세계를 갖지 못한 이들이 이를 대신해서 관계를 자신의 세계로 택한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특정한 ‘어디’가 아니라 여러 관계들의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관계의 의미 안에서만 살아가니 자연스레 고립의 의미와 맞닿게 된다. 이 고립은 홀로와 고독의 사이가 아니라 도망치지 않는다는 무원함에 깊이 자리 잡는다. 즉 오늘날 오타쿠와 시네필에 공통점이 있다면 이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는 점일 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차 소비 시대의 영화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