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목적 없이 쓰는 글은 엉망진창이 되기 쉽다. 가령 기사를 쓸 때는 위에서 아래로 중요한 정보를 배치하는 기법이 발달해있는데, 이는 결론부터 정해둔 채로 글을 써나간다는 점을 뜻한다. 아니면 글을 다 쓰고 난 다음에 위아래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정보를 전달하기에는 적합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작품이 전달하려는 건 어떠한 진실이 아니다. ‘작품’은 픽션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사실이란 없다. 그러니 작품을 보면서 대뜸 결론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부류일 수 있다. 애초에 곧바로 해답이 나올 문제라면 그건 처음부터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픽션 안에서 무언가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때 우리는 이를 단순히 허구로만 여기지 않는다. 현실의 가장 큰 특징은 ‘정답이 없다’는 점이기에, 정답을 보여주지 않는 영화일수록 점점 더 현실에 가까워진다. 어떤 건 되고, 어떤 건 안 되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허구’는 생각보다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령 작품 속의 범죄를 두고서는 ‘진짜’처럼 생생하니까 사람들에 트라우마를 안길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가 허구를 진짜처럼 여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를 인간의 공감능력이 발휘된 사례로 본다면, 반려동물을 사람과 동일한 인격체로 두는 일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테다. 인간은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서 무기체에 감정을 이입해 이를 옹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작품을 보면서, 그것이 ‘허구’이자 ‘무기체’임에도 진짜 현실처럼 여기는 건 그때문이다. 허구는 그저 허구일 뿐이지만, 그렇다 한들 진짜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무기체의 삶을 진실되게 여길 수 있으며 이를 애도하거나 기뻐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이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도 가능한데, 작품이 묘사하는 것을 현실의 반면교사로 삼는 덕분이다. 이 점에서 ‘반유기 방정식’이라는 한 방법론을 소개해보고 싶다. 영화(논픽션)가 현실이 될 수 없다면 현실(픽션)을 모조리 말살해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현실이 없으면 결국 유일하게 남은 것을 갖고서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서 현실을 배제하고 싶어한다. 반유기 방정식은 현실로 통하는 모든 길을 없애보려는 시도다. 영화가 현실을 말하는 법이 있다면 반대로 이 현실이 영화여야만 할 이유도 있다면서 모든 것은 결국 ‘운명’에 속해 있다고 믿는다. 결론부터 정해둔 채로 삶을 살아가기에 결국 인간의 운명은 ‘각오’하는 게 된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게만은 끝나지 않아서 아무튼 어딘가로 계속 이어지게 되어있다. ‘반유기 방정식’은 그러한 현실을 상쇄하려는 움직임이다. 현실을 제거해서 영화만을 세상에 남기는 게 아니라, 현실을 이루는 요소들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설계하면 그곳에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영화’가 대두하리라는 생각이다. 가령 생명체가 삶을 이어가는 기본 여건이 번식이라면, 영화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영화들은 매일 태어나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가 하나의 유기체라면, 영화에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건 사실상 무리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려 할 테지만 결국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어떻게든 좋은 결말을 마주하려 할 테지만 그 과정엔 결국 쌓아온 시간들에 저항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는 즉 우리가 죽음이나 소멸이라는 결말을 정해둔 채로 살아간다는 점을 뜻한다. 그렇다면 ‘영화’란 건 본디 사라져야만 하는 게 아닐까? 영화가 없으면 결말 또한 없다. 운명에 구속되지 않으니까 도리어 이전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영화란 어떤 대안이나 탈출구 없이 그저 앞으로 한발자국 나아가기만 할 뿐인 무언가다.
영화란 어떤 형태로든 각오를 동반한다. 가령 관객은 영화를 시작한 이상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자신이 시작한 일은 스스로 끝내야 한다는 뜻이기만 한 게 아니라 이 세계는 본래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예를 들면 “살만한 세계는 살만하지 않은 세계에서 비롯된다.” 주디스 버틀러는 고통과 절망이 만연한 세계에서 비로소 ‘삶의 희망’이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는 살만하지 않은 세계를 기본적인 상태로 보았다. 이로 인해 살만한 세계를 무대에 올리는 게 보편자의 역할이 된다. 보편자는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비탄에 빠진 무언가지만 반대로 그들이 서로 만나 모이며 연대하기에 ‘세계’는 살만한 곳이 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영화는 매끄러운 편집으로 표면을 감내하지만, 그 안은 불충분하거나 불완전한 것들로 가득하다. 살만한 세계란 결코 이상과 완전함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으며 영화는 이러한 것들의 연대에서 ‘살만한 세계’를 보여준다. 즉 영화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지루하고 무쓸모하며 많게는 고통스러운 대다수로 구성된다. 그래서 삶은 영화인 것이다. 삶과 영화의 공통점은 죽음의 마지막 환희를 위해서만 이 멋진 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오즈는 “삶은 드라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평범해 보이지만 오즈의 이 말은 ‘그렇기는 해도(But)….”라는 뉘앙스로 연결돼 있어서 영화를 항상 보편자의 우위에 올려놓는다. 삶의 순간은 매끄럽고, 그래서 무언가 생각이 끼어들 구석이 잘 없다. 바로 이 매끄러움이 우리가 생각한 대로만 삶이 흘러가지 않는 원동력이 된다. 삶이란 원치 않은 순간에 드러나는 희망으로 구성된다. 영화가 자유의지를 배반한다면 우리는 결국 이 세계에 ‘반-유기’ 방정식이 존재함을 믿어야만 한다. 영화가 현실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현실이 없다고 믿어야 한다. 이 세계는 우리 스스로 자유의지를 갖고 가꿔 나가는 게 아니라 자유롭지 않은 것에서 ‘자유’가 탄생하는 형태를 취한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는 미끄러짐은 슬랩스틱의 우화와 바닥에의 조우 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한다고 여기는 건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영화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나 환대는 모두 허구다. 비평의 역할은 우리가 느끼는 이 세계에 반대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가 모든 공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지만, 그렇기에 상쇄할 수도 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희망이 간절히 바라는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희망은 ‘살만하지 않은 세계’의 연속에서 생겨나기에 도리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순간에 드러난다. 이른바 희망이란 “생각하던 것과는 달라….”라는 점으로 보아도 좋다. 모든 이야기가 유기적으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듯이 어떠한 예외적인 순간은 일종의 ‘반-유기’적인 것과 같다. 반유기 방정식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지 않지만 그렇기에 도리어 자유를 마주할 수 있음을 증명해보려는 시도다. 이 점에서 비평은 목적이 있는 글이 되어선 안 된다. 특정한 이야기와 전개를 따라 진행되는 글은 반대로 우리가 바깥을 상상할 수 없게 한다. 목적이 있는 것과 목표를 향해가는 일은 서로 다르다. 우리는 특정한 목적을 갖고서 일을 꾸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세계가 바로 그런 목적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런 목적도 없다고 여겨야만 무언가 예외적인 순간에 진정으로 탐복할 수 있다. 만약 모든 걸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런 세계에서 실패는 회복 불가능성으로만 연결될 뿐이지만, 반대로 결정성에 얽매인 세계는 구애받음이 아니라 구애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게 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는 무척이나 ‘엉망진창’이 되어야 하는 걸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무언가 매체 속의 아이들을 보며 그런 걸 느꼈던 것 같다. 가령 <건담: 지쿠악스>의 마츄는 제멋대로의 성정을 지닌 여자아이다. 스즈미야 하루히 같은 계열의 발랄함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곳 세계에서의 ‘밝음’은 우리가 알던 것과는 뭔가 다르다. 마츄는 그저 평범한 사춘기 여자아이일 뿐이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소위 말하는 소년만화라는 것은 종잡기 힘든 충동으로 가득해서 보다 보면 이야기와 감정선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개연성과 혼동하기 쉽지만 결국 어른들은 자신도 이런 타입의 아이였던 걸 잊어버린 것만 같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이상하지?”라거나 “왜 자신이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라면서 “생각하던 것과는 달라….”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른들은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지만 사실은 ‘아이다움’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뿐이다. ‘어른’이란 어떻게 해야 그게 될 수 있는지 딱히 정해진 바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목적 없음’의 행위이다. 이 어른들은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하기에 도리어 어른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른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유기한 게 아니라 품어보려 했던 ‘반-유기’의 행동을 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