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노케 히메> 중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자신을 구한 아시타카를 못마땅해하며 산이 아시타카의 목에 칼을 들이대자, 아시타카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라. 그대는 아름답다.” 누군가는 “반대로 하면 ‘죽어라. 그대는 못생겼다’인거냐”고 묻겠지만, 사실 이 말은 생각보다 꽤 중요하다. 생존에는 이유가 없고, ‘존재’는 목적이 아니며, 그렇기에 자연은 원죄와 원망의 대상 모두 될 수 없다. 이를 따르자면 인간은 태어난 이상 삶의 목적이나 쓸모를 찾으며 살아가지만 사실은 ‘그저 있는 그대로도 괜찮다’. 특히 <모노노케>가 특별한 이유는 동시기 작품들 중에서는 유일무이하게 존재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공각기동대>나 <가타카> 같은 작품이 인간생명의 목적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면 <모노노케>는 그저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삶의 목적이나 방향을 자문하며 끝없이 자신과 투쟁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문구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영화의 기능은 바로 그것이 돼야만 한다. 영화는 투쟁의 대상도, 투지의 대상도 아니다. 영화는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영화에 삶의 의미라던가 세계의 진실 같은 걸 찾으려 드는 순간 영화는 아무런 목적 없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영화를 보는 일은 말 무언가 대가를 구하면서 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일방적으로 쏟는 증여관계일 뿐이다.
지카우치 유타는 인간에게 관계가 필요한 때는 일상생활에서 무언가를 주고받는 ‘교환’이 성립하지 못하게 됐을 때라고 말하면서 증여의 중요성을 말한다. 『세계는 증여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 증여는 한 개인이 전적으로 관심을 쏟으며 한 세계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사소하게 남는 것을 외부에 보탬으로써 이 세계가 느슨하게 연결되기를 바라는 행위다. 무언가 목적이나 의도를 갖고서 상대방에 마음을 베풀기보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에 베풀었을 뿐이다. 영화를 보며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영화는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충만하다. 굳이 대사를 한 줄씩 읽어가며 의미를 담지 않아도, 심지어는 아무런 뜻도 이해되지 않는 외국어 영화를 보더라도 영화는 이미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지 않으니까 우리도 영화에 무언가를 굳이 베풀지 않아도 된다. 영화와 관객의 관계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교환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느슨하게 엮여있는 증여에 가깝다. 만약 사람들이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들 곁에 남아 서로를 도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으니까 관객들이 영화의 곁에 남는 것뿐이다.
관객은 영화를 단순히 보러 가기만 하는 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일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도움이 필요한 다른 누군가에 전하는 일이다. 오히려 영화가 한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세계를 무겁게 견디고 있기에 우리가 나서 곁에 있어주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한 사람의 삶이 고통이나 슬픔에 잠겨있는 만큼 그 자신의 삶도 우울감으로 점철돼있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그 삶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지만, 반대로 함께 있어주는 것만은 가능하다. 꼭 앞장서서 무언가를 바꿔야만 하는 건 아니다. 영화와 현실은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해있고 우리 자신도 타인의 마음을 영영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목소리를 내는 일은 상대방에 닿지 않으며 진심은 일부 손실되거나 심지어는 곡해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마음을 전달해야 하는 건 이 세계는 한 사람의 거대한 힘이 아니라 사소한 마음씀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구역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한 장면씩 계산된 것을 보며 놀라움에 빠지는 때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무언가를 돌려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영화가 남긴 것들은 고스란히 우리가 짊어져야 할 부채가 되고야 만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영화는 완벽한 꿈이기보다 불완전한 현실이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따금 영화를 보는 이들이 무기력함에 빠지는 일을 목격하곤 한다. 그들은 혼자서 감당하기엔 버거운 감정들을 내려놓으려고 이곳에 온다. 이런 것도 증여로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대방에 아무런 대가 없이 무언가를 베푸는 일은 어쩌면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해치는 일일 수도 있다. 선의로 베푼 마음이 혹시라도 상대를 다치게 하는 일은 현실에서 흔하다. 타인에 의존하는 이는 그 탓에 혼자서 살아갈 힘을 잃기도 하며 심지어는 섣부른 오해로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자신이 그만큼 나약하고 보잘것없게 보이냐고 되물으면서 상대방에 원망을 퍼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막연하게 상대방에 증여를 하는 일이 꼭 옳다고만은 말할 수도 없다. 서로를 상처입히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주고받기보다는 그저 드문드문 한 채로 곁을 스쳐 지나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부디 세상을 살아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건 그리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 인간의 능력 중 하나가 시선을 던지는 것이라면, 상대방에 측은함을 갖는 것도 증여로 보아야 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 관심을 쏟는 일은 적어도 아무런 대가 없이 화면을 응시하는 영화관람의 행위에 견줄 수 있다. 마음의 형태를 유지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는 이 세상에서 시선을 던지는 일은 이타심에 가깝다.
영화를 보는 일은 기본적으로 증여를 전제로 한 행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닫힌 세계이면서, 끝을 앞둔 세계이기에 그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것을 잘 알고 있다. 영화는 완벽한 꿈이 아니라 불완전한 현실이어서 그 자신이 미완의 결말과 죽음이라는 확실한 사태를 마주하게 될 것을 잘 안다. 관객은 이들 영화에 아무런 대가 없이 시선을 던짐으로써 이들 세계에 빛을 되찾아준다. 영화이론에서 시선을 던지는 주체성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일방적으로 응시당할 뿐인 세계는 스스로 바깥에 나설 기회를 잃으며 이 시선의 일방성이 권력의 모습을 재현한다고 말이다. 이를 따라 영화는 항상 피해자의 위치로만 해석됐으며 이때 ‘시선’은 상대방에 대한 동정이나 통제의 행위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영화는 원죄와 원망의 대상 모두 아니다. 영화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꼭 어떤 목적이 필요하지는 않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 중 하나로서, 우리가 손을 내밀거나 반대로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한 대상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한 영화를 오해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영화가 우리를 오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닫고 소통하기를 거부해버리면 우리는 결코 서로에 손을 내밀 수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영화는 우리와 같은 세계에 속해 기쁨과 슬픔 등을 공유하는 한 개인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사소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행동 중 하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 새로운 해석이나 길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그저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증여를 실천할 수 있다. 세상은 혼자서 구할 수 없고, 그렇기에 더욱이 사람들 간의 작은 실천을 한데 모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 실천이 처음에는 거국적이거나 부담스럽게만 느껴질 수는 있어도, 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고 나면 마음은 조금 바뀔 수 있다. 세상은 능력 있는 한 개인이 아니라 바로 곁의 사람들에 쏟는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분명 영웅이란 건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자신이 영웅인지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영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보고 듣고 목격하는 일이 세상을 향한 작은 실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가 단순히 시선을 받아 현실의 일부로서 소화되는 것뿐이라고 본다면 이 일은 보잘 것 없을 수 있다. 시선을 던지는 능력이 끝내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가 서로에 말을 건네는 일상은 부질없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에 전하는 안부인 게 아닐까. 타인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알게 되듯, 우리가 이 세계에 안녕을 고하는 법은 영화를 보는 일이다.
영화가 우리의 삶을 구하기를 바라며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관계의 핵심은 우연성과 연대, 그리고 아이러니다. 김병규 평론가의 말처럼 “자의적으로 의미를 조합해 해석을 만들어내는 형태”의 비평이 이 세계를 단순한 표면으로만 이해한다면, 영화를 보는 일은 무언가 답을 요구하는 게 될 수도 있다. 무언가 영화가 길을 제시해주었으면 좋겠다며 의미를 발굴해내려는 건 그만큼 현실이 불투명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어서일 테다. 하지만 영화에 답을 구해봐야, 서로 같은 세상을 살아가니 무언가 뾰족한 수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래도 영화를 보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지는 않다. 영화를 보는 건 닫힌 세계와 불투명한 현상들을 목격하는 게 아니라 열린 미래에 불안을 느끼는 우리가 작은 세계로서, 삶으로서 상대방의 마음에 깊이 이입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일상 실천으로서 영화는 이 세계에 속해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면서 감정을 나누는 역할을 해준다. 즉 영화도 자신이 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평범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니 영화에 무언가 역할이나 의미를 기대하기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 서로를 껴안는 편이 더 낫다. 우리는 세상에 답을 구하려 하지만 반대로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안은 존재들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