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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빈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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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수의 석사학위논문 “‘여전히 영화를 ‘트는 사람들’”을 읽었다. 글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건 씨네21에 실린 마이크로시네마 특집을 두고서 ‘마이크로시네마’가 영화 문화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고 진술하는 대목이었다. “굿다운로드’ 담론을 주도하던 영화잡지가 ‘마이크로시네마’로 자유 상영을 호명하고, 비공개 토렌트 트래커 등을 언급하는 기획기사를 게재하는 것은 해적질로 촉발된 지금의 자유 상영이 영화문화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만하지만, 이 문제가 저작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해적질을 문화로 지칭하며 질서에 편입하는 순간 문제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작년에 화제가 됐던 한민수의 『영화도둑일기』가 지적하듯 자유상영을 위한 판본은 ‘즈엉품’이 될 확률이 높다. 예술 영화를 정식 경로로 구할 수도 없으니 이런 밀수 작업은 모두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즉, 씨네21이 마이크로시네마를 소개하는 대목은 “’영화를 상영하며 소개하는 문화’와 공동체에 초점이 있을 뿐 그것이 어떤 경로로 등장해왔는지를 다루지는 않는다”는 점을 뜻한다.

출신지가 어디든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인사 문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적법성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한국에서는 한국 사람이 아니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법 조항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작품은 공적인 무대에 오를 수 없다. 그래서 마이크로시네마는 공적인 면이 아니라 지하의 영화들로 뭉뚱그려지며 이는 곧 마이크로시네마가 거대한 하나로 통칭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박동수도 이 부분을 논문에서 지적하며 “새로운 배급 경로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맥락에서 등장해왔다”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도권 ‘바깥’에서 대안을 모색하려는 행위를 저작권을 ‘우회’하는 일에 빗댄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바깥’이 대안과 동의어가 아니듯이 ‘우회’는 ‘허가’를 뜻하지 않는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불법이다. 문제는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해외 영화는 저작권자 직접 소송을 걸거나 하지 않으면 처벌받을 일이 사실상 없다는 점에 있다. 권리권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그 사실을 타 국가의 정부에 알리는 것도 어렵다.

워너브라더스나 디즈니처럼 범국가적으로 활동하는 대형 법인이 아니라면 ‘즈엉품’의 유통을 단속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어렵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운용하는 업체처럼 이미 동영상 파일의 메타데이터를 확보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인터넷을 거치지 않으면 이것도 무용지물이다. 사실 영화를 공개적으로 상영하는 일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은 이미 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그렇다. 프로그래머들은 자신이 틀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로 떠나기도 하는 등 많은 공을 들인다. 필요하다면 다른 국가의 영화 수장고에 가서라도 영화를 수배하기도 한다. 이는 대부분의 영화제가 공공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므로 공적인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할 수는 없으며, 영화제는 영화계 전체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저작권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유상영’은 단순히 소유 자본의 부재를 넘어 책임감의 부재처럼 여겨지는 점도 분명 있다. 영화를 보고 싶다면 어떤 경로로든 볼 수 있겠지만, 이를 개인 차원이 아니라 공공 차원으로 넘기는 일은 더는 눈감아줄 수만은 없는 일이 된다.

“영화를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시네필리아의 주요한 동력으로 등장했다.“ 어쩌면 이는 점점 개인화돼가는 사회분위기가 영화계에 반영된 결과는 아닐까? 예전에는 영화가 민중 담론으로 기능하며 공론장을 형성했다면 오늘날 영화는 개개인에 의해 성취되어 소비되는 ‘사유재산’이다. 많은 독립영화가 제도권에 소속돼 본연의 색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은 유효하나, 반대로 많은 독립영화가 자기를 말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소위 ‘일기장 영화’로 불리는 독립영화 분과나 ‘에세이 영화’, ‘오디오 비주얼 필름’ 등의 ‘나’ 영화가 그런 부류다. 모든 것은 ‘나(I)’가 되어가고 있으며, 세기의 아이(I)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 세계는 내부공간(InnerSpace)이 곧 거대한 ‘바깥’이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외부로 나가는 건 ‘평생을 동물원 안에서 살아온 동물들에게 야생의 본능을 키워주고자 갑자기 야생에 내쳐버리는 것’과도 같다. 이 안에서는 제도권 안에서의 ‘독립’과 본래 야생에서 살았던 ‘독립’이 서로 구분되고 있지 않다. 이 세계가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으니까 무엇이 ‘독립영화’인지도 저마다 해석이 다르다.

“조금씩 다른 성격과 방식을 지닌 상영 활동을 한데 묶는 것 또한 분석의 오류를 제기한다.” 오늘날 독립영화는 제도권 안에서 가축화한 종이 있고, 제도권에 속하지 않으며 여전히 본래의 유전자를 소유하는 종이 있다. 이미 이 둘은 분화한 지 오랜 시간이 흘러, 둘 사이에 교잡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언정 서로 같은 종으로 볼 수는 없다. 마이크로시네마에서 지칭하는 건 이 둘 중 하나가 아닌 새로 등장한 무언가다. ‘뉴타입’이라고나 할까. 씨네21이 마이크로시네마를 탐구하는 방식은 수십 년 전 일본에서 오타쿠가 새로운 문화로 등장해왔던 때를 연상시킨다. 당시 건담 등을 필두로 등장해온 애니메이션 팬들이 오프라인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이어가는 일은 있었는데, 이를 새로운 현상으로 인식했던 언론이 이들을 만나 ‘흥밋거리’로 취재에 나선 것이다. 이후 오타쿠 문화가 단순한 현상 이상의 것이 되자 언론도 이들을 만나 진지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태도 바꾸기에 나섰다. ‘마이크로시네마’에 대한 시선도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이크로시네마가 단순한 사건을 너머 현상에 가까워지자, 이를 제도적으로 ‘정의’해보기에 나섰다.

제도권 안에서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건 어렵다. 제도권 내부와 ‘바깥’으로만 바라보면 단순히 제도권 안에 살 수 없어서 밖으로 망명하거나 추방돼버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마이크로시네마를 이끄는 주역은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처음부터 제도권 바깥에 살던 이들이다. 이들에게 제도는 자신의 유전적 고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도리어 ‘중력’에 사로잡혀있지 않아 발휘할 수 있는 능력들이 있기까지 하다. 시네필에게 ‘자신이 원하는 영화’에 도달하는 정도의 능력은 분명 시네마테크가 선사하는 수동적인 경험에 비하면 ‘뉴타입’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게, 영화제에서 먼저 프리미어 상영을 본 뒤 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던 기존 역할에 훨씬 앞서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평론을 읽는 시대는 평론을 읽기 위해 영화를 보는 시대로 바뀌었다. 이 안에서 평론은 절대다수가 ‘미달’돼 있다. 영화를 보는 일과 받아들이는 일 모두 세분화하는 시대에 평론은 그러한 제도권 ‘바깥’에서 태어난 이들이 새로 만들어가는 ‘개척’에 가깝다. 그래서 씨네21은 이 뉴타입의 능력을 정의하기에 나서며 ‘밀레니엄 시네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중 누군가 “모두가 제도권에 살 수는 없다”면서 의도적으로 제도권을 파괴해버리고, 모두가 ‘바깥’으로 나가야 영화문화가 ‘진화’할 수 있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다. “제도화를 영화운동 요구의 수용으로 보며 성과로 바라보는 시선과 운동조직이 관료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상반된 시선”은 결국 제도 자체를 붕괴하자는 태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처음부터 제도 밖에서 태어나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개척’은 ‘정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모두가 인터넷을 떠도는 영화 파일로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된다 해서 영화에 대한 이해가 더 높아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우리가 떠나온 필름 시대, 시네마테크 등의 유산을 저버리는 것만으로 영화문화가 발전할 수 있다면 이미 진작에 하지 않았을까. 앞서 말했듯이 서로가 이미 다른 종이 되어버렸다면 강자와 약자를 나누기보다 공존의 논리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기에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마페졸리는 공리주의적인 ‘개인’과 ‘사회적인 것’을 대신하는 ‘정서적 공동체’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바로 뉴타입, ‘바깥’의 시네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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