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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와 폭발 사이에서

<얼굴>(2025)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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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의 <얼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배우 박정민이다.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짜증을 잘 내는 연기자인 그는 여태껏 수도 없이 많은 짜증 연기를 선보여왔다. <시동>에든, <지옥>에서든, <사냥의 시간>에서든, <무빙>에서든, 심지어 단역으로 출연한 <헤어질 결심>에서도 그는 짜증을 내는 동네 건달로 출연했는데 어쩌면 이미 짜증 전문 배우가 된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박정민에 대해 연기가 다 비슷하다는 일부 평가가 있던 것도 바로 그런 연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느낌의 연기가 다양한 곳에서 반복된다면 그렇게 느낄 수 있다. 한 배우의 이미지를 보고 캐스팅을 하는 일은 도리어 그 배우를 그런 ‘느낌’에 가두어두기도 한다. 이 경우, 배우는 그것과 비슷한 배역이 아니면 다른 배역을 맡기 어렵다. 이 글에서 함께 말해보고 싶은 건 그와 같은 캐스팅이 어쩌면 중위집단을 표방하는 건 아닐까 하는 가정이다. 그냥 1부터 100까지 나열했을 때 딱 중간에 있는 한 사람을 뽑으면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있지 않을까. 즉, 여러 작품 속에 있는 박정민이 항상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품고 있으며, 이를 따라 그가 업고 있는 건 더욱 거대한 시대가 아닐까. 마치 반항의 아이콘으로 남은 할리우드의 제임스 딘처럼, 박정민은 ‘익사’를 대변하는 캐릭터인 것처럼 보인다.


사회학적으로 분류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캐릭터가 선보이는 무기력함에 관심이 있다. 강덕구는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에서 자신이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숱한 문화적 시도들이 도리어 그것을 하나의 흔적으로서 전시하는 일에 깊은 회의감을 내비친다. 저항정신을 지닌 락 앤 롤이 도리어 비틀즈와 같은 아이콘이 되어버리는 일 등을 보며, 주류에 반하는 문화적 술식이 도리어 허식으로 흡수되는 일을 지적한다. 강덕구에게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은 문화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난 그가 문화에 가하는 비판이 다시금 자신을 문화적 지위를 가진 인물로 올려놓는 일에 대한 ‘무기력감’을 묘사한다. <얼굴>을 비롯해 박정민의 출연작에서 묘사되는 무기력감은 아마도 이런 부류인 것 같다. 그는 항상 화를 내며 짜증을 내지만, 이는 자신이 몸 담은 배경이나 사회 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비롯된다. 짜증을 낸다는 건 자신이 바라는 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인데, 그가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에서는 그걸 극복하며 성장하기보다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기만 하는 일이 더 잦다. 나쁘게 말하면 수동적인 캐릭터고 좋게 말하면 시대적인 캐릭터다.


이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난 건 역시 <동주>다. <동주>에서 박정민은 저항시인 윤동주의 동료, 송몽규 역을 맡아 연기한다. 이 영화에서 동주는 무력함에 빠지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운동가들을 생각하면 동주의 모습이 꼭 그 시대의 표준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동주는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시대의 등불로 바꾸려 했고 이 점을 그를 저항시인으로 만든다. 중요한 건 ‘무기력함’이 아니라 저항하는 일에 있다. 그래서 강덕구는 자신이 비판하는 문화권력이 자신을 어떠한 우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점을 두고서 익사한 남자라는 표현을 쓴다. 물의 표면저항을 이겨내지 못한 채, 깊은 수면 아래로 빠져들고야 만 것이다. 표면저항은 물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 면에 고루 작용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 인간이 동화되지 않으며 서로에 반발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당장 <헤어질 결심>만 봐도 홍산오 캐릭터는 깊은 자살충동에 시달리고 있지 않나. <사냥의 시간>도 상황을 극복했다기보다는 문제가 되는 무대를 이탈한 쪽에 가깝고, <지옥>에서는 장르의 특성상 기도하는 일 밖에는 하지 못한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시동>에서 맡은 역할 정도랄까.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면 박정민이 맡은 캐릭터는 깊게 동여맨 얼굴 아래 복잡한 감정이 오가며 이것이 밖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이 점에서 박정민의 ‘짜증 연기’는 항상 미완의 형태로 남는다. <얼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 진실을 묻고 “너는 나를 이해하지”라는 말을 듣지만, 이 사실에 제대로 답을 하진 않는다. 얼굴은 여태껏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복잡다단하지만 속내를 시원하게 드러내진 못한다. 아마도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PD를 따라다니며 보고 들은 정황사실에 논리적으로 설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그는 오열하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외모가 평범해서일까. 그렇다고 보면, 아마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일 공산이 크다. 사람이 못생겼다고 죽이는 건 말도 안 되지만 그나마도 일말의 핑곗거리조차 사라져버리고야 말았다. 아버지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상대방을 배신한 꼴이 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다. 어머니의 외모에 대한 언급을 따라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게 없어도 별 무리 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못생겨서가 아니라 자신의 앞길을 막았다는 마음에 사로잡혀 일을 저질렀다. 사건의 원인을 상대방에 전가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자신의 판단이자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 논리는 작중의 사장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성폭행 피해자가 도리어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이 시대는 표면적으로 내비치는 이미지나 편견 등에 사로잡힌 듯한 느낌이 있다. 소위 말하는 시대적 한계라는 게 존재하고, 일종의 표면장력이 존재한다. 어떠한 투명한 벽이 존재한다면 그 안에 머무르며 안전하게 길을 탐색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혹자는 이를 안전함에 머무르려는 것으로 바라보겠지만, 그보다는 무기력함이라는 한 행위표현에 가깝다고 본다. 이 영화에서 박정민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찾아온 낯선 친척들에서 시작해 여러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발언을 묵묵히 듣기만 한다. 마치 거세된 수소처럼 화를 삭이기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무력을 행사하지는 않더라도 거세게 반발하거나 할 수는 있었을 텐데 사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내 무기력하기만 한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항상 스크린 안에 머무르려는 성향이 있다면 그 안의 정동이나 행위들은 자유분방하게 자기를 펼쳐 내려 한다. 영화에서 ‘얼굴’은 정확히 그런 뜻에서 ‘스크린’의 역할과 동일한 입지를 지닌다. 영화는 표면을 통해 알 수 없는 감정들에 연결고리를 제공하고 이를 합리화하는 ‘설득’의 과정을 거칠 뿐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감정들은 있는 그대로가 얼굴에 드러나 보이는 게 아니라, 단순히 표정이라는 한 형태로 설득될 뿐이다. 당혹감이나 비애감, 웃음이나 환대는 표면 위에 놓인 맥락에서 감지되지 않으며 영화의 물 밑 작업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그런 감정들이 얼굴을 통해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이는 감정들의 ‘익사’에 다름없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박정민이 화를 참아내다가 골방에서 죽어가는 사장을 만나는 장면이 도드라진다. 이전까지는 여러 두루뭉술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자리했다면, 화를 냄으로써 그런 생각들에 확신을 얻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무기력함이 일종의 미완으로서 확정 가능하지 않은 불합리의 상황을 보여준다면 표면을 초과하는 정동은 어쩌면 합리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그런 합리성이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을 완성한다. 작품은 마치 어머니의 외모를 논리를 따라가는 닻줄처럼 묘사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외모가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아 준 아버지에 반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표면으로만 존재하는 현상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안을 돌아다니는 힘들을 파헤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만나서 공장 내의 범죄 사실에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는 건 그 점을 뜻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신을 이용했다고 생각해 어머니에 분노했다. 도리어 앞을 볼 수 없어 시선이 표면 밖을 향하지 못했고, 감정들이 익사하기 전에 허겁지겁 이를 터트린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한 가지다. 영화에서 스크린은 감정들에 연결고리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관객이 하나의 독자적인 자기를 이루게 해준다. 여기저기 흩어진 감정들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본래 이 세계가 거센 혼돈에 빠져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우리는 눈을 감은 채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어쩌면 영화는 그 안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터트리게끔 몰고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익사와 폭발 사이에서 우리가 보는 건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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