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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추락하기 위해 극장에 가는가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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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극장에 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비슷한 환경에서 이를 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정성일은 <탑건: 매버릭>을 재밌게 보는 법 중 하나로 ‘기내에서 창문 밖의 구름을 감상하며 보기’를 든다. 비행기 안에서 비행기를 보는 일은 확실히 ‘리얼’한 체험임이 틀림없다. 아무리 4DX 좌석을 흔들어봐야 기내에서 만난 난기류보다 더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매버릭>은 매버릭의 리얼한 체험에서 시작한다. 블랙스타에 탑승한 매버릭은 마하10을 돌파하는 순간 정신을 잃고 바닥에 추락하고야 만다. 어쩌면 이 모습은 영화를 보며 졸음을 경험하는 순간에 빗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자신의 영화에서 ‘잠’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영화가 보여주는 꿈과 무의식의 경계는 현실의 수면과 유사한 상태’임을 강조한 바 있다. 그에게 영화는 일종의 수면 상태이면서, 가사 상태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니까 만약 김병규 평론가의 말대로 <매버릭>의 이후 전개가 모두 매버릭의 꿈에 불과하다면 관객 또한 길고 지루한 꿈의 통로를 지나는 것일 수 있다. 이 체험에서 음속을 이겨내는 매버릭의 신체는 졸음에 저항하는 관객의 신체에 대입된다. 거대한 졸음의 무게에 저항하는 것은 약하디 약한 신체이며, 이때 정신은 육신의 무게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즉 졸음을 경험하는 관객은 일종의 ‘추락’ 상태에 놓인다.

장 뤽 낭시는 태양을 동경하던 이카루스의 설화에서 추락의 경험을 발견한다. 그는 추락의 상태에서 정신이 몸의 사방으로 흩어지며 오히려 전방위적 집중 경험을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를 따르자면 추락은 도리어 평소에 흩어졌던 신체를 동시다발적으로 통제하는 경험이다. 바꾸어 말해 졸음은 영화의 특정 장면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는 관객이 영화 전체에 동시다발적으로 편재하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매버릭>이 코로나 판데믹 시기에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았던 작품이었음을 떠올려보자. 극장이 하나의 거대한 죽음이 되었던 시기, 사람들은 극장에 대피해 이 시기를 이겨 내려 했다. 그러나 넓게 확장된 죽음은 ‘바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구를 향해 추락하는 매버릭의 모습은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보다 추락의 경험에 더 가까웠다. 매버릭의 비행으로 무인기 프로그램은 잠시 지연되지만 결국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점점 첨단 기술은 기계만의 것으로 남을 테고 인간은 F-14처럼 전자프로그램 통제를 받지 않는 ‘구닥다리’를 맡게 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하늘을 향해 가는 우주셔틀처럼 인간은 기계를 하늘로 보내기 위해 쓰다 버리는 연료통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는 지구에서의 순간일까 아니면 우주에서의 영원일까. 무인기에 의해 파일럿이 대체될 것이라는 상부의 지적은 단순한 러다이트가 아니다. 영화가 CG와 같은 첨단 기술에 힘입을 것으로 보는 입장은 상태를 낙관적으로 바라보지만 인간의 지위가 상실됨으로써 영화만이 갖는 고유의 ‘기계적 시선’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기계적 시선은 딱히 객관적이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AI로 구성된 영상은 특정한 순간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웹에 동시다발적으로 산재한 이미지에 질서를 특정한 것에 불과하다. 생성형 영상에서 ‘원본’은 특정한 무언가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편재한 웹 전반이다. 그러니 원본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기계에게 인간은 참조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일 뿐 전적으로 모방의 대상이 되지만은 않는다. 즉 오늘날 기계적 시선은 기존에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었던 추락의 경험을 탈취했고 이제 둘 사이를 구분할 수 있는 건 없다. 사격과 폭격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인기든 유인기든 똑같이 위협적이다. 그 점에서 <매버릭>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파일럿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점점 더 희미해져 가는 인간적 시선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해서 “왜 극장인가”하는 이유 말이다.

다시 글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면, 극장은 일상과 다른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기 부적절한 공간이다. 극장만의 경험을 강조하는 건 단순히 전통 수호처럼 들릴 수도 있다. 도리어 극장이 점점 사양산업에 접어들고 있다면 추락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추락이 편재하는 순간으로 구성됨을 떠올릴 때 도리어 극장의 사양산업화는 그게 특정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삶 전반에 산포하게 됐음을 뜻하는 것 같다. 우리가 알던 것과 달리, 극장은 멸종위기에 놓인 게 아니라 수렴진화의 길목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품고 있던 셈이다. 그래서 <매버릭>은 도리어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극장을 제공하는 간이 형태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가령 전기차의 경우 순간 가속력이 좋은 반면 배터리팩으로 인해 무게중심이 아래에 있어 기묘한 승차감을 제공한다. 아래에서부터 무게중심이 달려나간 후 탑승자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형태인데, 이 느낌은 기어의 순차적인 변환이 이루어지는 내연기관 차량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니까 핵심은 지상에서 중력의 영향이 없는 듯한 느낌을 제공한다는 점, 전기차가 일종의 ‘탈출속도’를 낸다는 점에 있다. 우주선의 탈출속도는 중력을 상쇄하는 만큼의 추력으로 구성되는데 이때 조종사의 신체는 바닥에서 전방으로 이행, 즉 ‘추락’을 경험한다.

대령에서 더는 진급을 하지 못하고 있는 매버릭은 만년 사고뭉치에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다. 친구인 아이스맨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불명예 제대했을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마지막인 것 같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소위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그에게 신체는 추락의 전방에서, 삶의 최전선에서 죽음을 향해가는 중에 있다. 그에게 ‘오늘’은 남은 인생에 가장 좋은 날이자 ‘살아있음’을 체험하게 하는 분투의 순간이다. 그런 매버릭은 “자신의 임무는 팀원들을 집으로 데려다 놓는 것까지”라고 말한다. 매버릭에게 비행의 순간은 유일하게 그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동안일 수 있고, 또 그렇기에 매순간 탈출속도를 낼 수 있다. 주변인들 사이에서도 매버릭은 무언가 따라잡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는 술값을 내는 것조차 약간의 시차를 두고서 갚는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팀원들에게 생각하기보다 몸으로 먼저 움직이라고 말하는데, 끝내 과거에서 벗어나는 일에 성공한다. 얼핏 보았을 때 서로 추락을 향하는 듯 보였던 관계들은 그가 더 큰 힘으로 미래를 박차 올리며 멋지게 봉합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조각난 꿈에 부푼 관객을 집으로 귀환시키는 것까지를 자신의 역할로 갖는다. 이때 탈출속도는 영화를 떠나는 힘이 아니라 ‘추락’을 성공하게 하는 힘,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힘으로 볼 수 있다.

영화가 다양한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뼈대가 되는 건 단 하나다. 무인기가 등장했고 조종사가 대체될 것이라는 점이다. 상부는 인간 조종사에 한계가 있다고 말하며 무인기의 도입을 합리화하려 한다. 덧붙여서 초음속에서는 조종사가 블랙아웃을 겪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영화는 줄곧 경고한다. 판데믹이 종결된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는 <매버릭>은 우리가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를 거대한 어둠과도 같다. 마치 매버릭이 마하10을 기록해 유영하던 성층권의 풍경처럼 ‘어둠’은 거대한 단절이 아니라 확장된 ‘바깥’을 보여줬다. 판데믹 이후 세계는 거대한 불면증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극장이 일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공간이라면, 이 안에서 ‘극장’은 우리 의식이 일시적으로 응집되는 기상현상이며 그렇다면 ‘영화’란 잠들지 않는 이 세계에 내려진 처방일 수 있다. 이미 온 세상이 극장이 되어버린 채라면 지금 이 세계는 일종의 주마등이다. 하지만 신체가 정신에 앞서 정렬되고 나면 우리는 그런 죽음에 앞서 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한 발짝 죽음을 향해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으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 발자국 앞으로 걸으면 과거를 얻지만 두 발자국 뒤로 걸으면 미래를 얻듯, 영화에 반하는 것은 극장이 갖는 고유의 역할인 것이다.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의 해변 장면이 나에게 <매버릭>의 해변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건 그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은 타키온이 자신에게 정해진 죽음에 저항하면서 탈출 속도를 내는 플롯으로 구성된다. 내내 영화 밖을 바라보며 추력을 내던 타키온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멋지게 달려나가는 모습은 그동안 영화가 선보이던 '착오'를 멋지게 깨부순다. 매버릭과 타키온은 마지막임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 간에는 서로 다른 부류의 외견과 현실 등이 자리하지만 적어도 '착오'를 인정하고 이를 발판삼는다는 점에서 인정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 관객은 그 기대에 멋지게 화답할 수 있을까? '영화'는 항상 특정한 부류의 '바깥'을 지닌다. 전자가 후자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다. 우리는 항상 특정한 세계에 갇혀 자신을 규정하고는 한다. 마치 GPS가 성층권에 반사되는 전파를 이용하듯 우리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바깥'을 요구한다. 하지만 때로는 죽음에 저항하는 탈출속도로 그 자아의 중심을 벗어나 보는 것도 좋다. 모든 영화는 끝이 나게 돼 있고, 세계를 사로잡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삶의 한 시기를 보내는 게 아니라 반대로 한 세계를 떠나보내는 이별의 모험이 바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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