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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박스에 갇힌 여름

<태풍클럽>(1985)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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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한국은 소마이 신지붐으로 들썩이고 있다.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이 2024년 여름 정식으로 개봉한 점에 힘입어 2025년 여름에는 <이사>가 국내에서 정식 개봉했다. ‘정식’을 두 번이나 붙인 건 암암리에 시네필 사이에서 유통됐던 작품이어서다. 일찍이 소마이 신지는 시네필들 사이에서 ‘주목해야 할 감독’으로 분류됐지만 국내에서 정식으로 만나볼 방법은 없었다. 다들 어디선가 떠도는 ‘소마이’를 저마다 목격했다고 보아도 좋다. 이런 건 어느 예술영화나 별반 다르지 않은 (음지의) 사실이지만 사실 생각해볼 만한 지점은 따로 있다. <태풍클럽>은 청소년이 알몸으로 등장해 일탈을 일삼는 내용이며 이런 점이 다수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점이다. 영화문화에 대한 관심은 둘째치고, 어른에게 반항하면서 무언가 교육적으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이 영화가 극장에 내걸리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 속 아이들은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지는 않겠다”는 말 뿐 무언가 구체적인 실천이나 방법론도 결여돼있다. 그저 반항만을 위한 반항처럼 보인달까. 그러니 <태풍클럽>의 국내 정식 개봉이 의미하는 바는 외적으로도 상당하다. 이 불편함이 공공연한 것으로 외부에 노출되어 바라보아진다는 건 그만큼 문화적 포옹력이 넓어졌던가, 아니면 이 세상이 영화를 뒤늦게 따라잡았던가 둘 중 하나일 테다.


후자의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고 싶다. 세상은 영화가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말하며 영화가 개봉한 시기를 어느 오래된 미래에 빗대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지리적으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가령 <태풍클럽>에서 잠시동안 비가 멈추는 장면이 있는데 이 순간은 아이들의 광기가 정점에 이른 시기, ‘태풍의 눈’에 속한 시기다. 기적처럼 비가 멈추는 이 순간은 아이들의 광증어린 행동이 잠시 중단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일에 불과하다. 오히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면 아이들의 광증은 더욱 심해져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기까지 한다. 이 짧은 순간은 나머지 반복이 응축된 시작점으로 기능하면서 영화가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는 모두가 원점으로 돌아와, 언제 그랬냐는 듯 삼삼오오 학교로 돌아간다. 그 중간에 창문에서 아래로 떨어져 비를 내리는 테루테루보우즈를 실현하기도 하지만 이 제물의식은 그가 진흙탕에 추락함으로써 실패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아이는 추락을 택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목을 매달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비를 내리는 데 실패한 아이들은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지는 않겠다”고 말하던 아이들은 폭풍우 안에서만 일시적으로 소년성을 감출 수 있던 것이다.


소년성은 일시성이다. 그리고 일시성은 동시대성을 뜻한다. 왜냐하면 동시대인이 어떠한 사건에 주목하며 자기들의 시대를 설명할 때 그러한 사건은 특정한 시대에 만나 ‘순간’을 결성하기 때문이다. 이 점으로 영화를 바라보면 결국 소년성이 광증으로 표현되는 일은 여러모로 특기할 만하다. 어느 여름날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이들 간의 비밀로만 남게 되는 건 한 영화가 스크린 안에서만 존속할 수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픽션과 논픽션의 문제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영화와 현실의 관계는 일기예보와도 같아서 현실이 영화를 예보할 수는 있지만 반대로 그게 꼭 사실이 되는 건 아니다. 현실은 절대적인 사실이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태풍클럽>은 시작부터 태풍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대사를 따라 축제의 순간이 다가옴을 예견하는데 이는 축제의 속성을 따른다면 ‘모든 것에서 예외’인 순간, 파국의 순간에 가깝다.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건 반대로 이를 구할 법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태풍이 오는 순간, 학교의 아이들은 자신을 구할 수조차 없다. 이 안에서는 모든 과거나 미래가 지워진 채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그에 대한 증거로 아이들은 옷을 벗어던짐으로써 문명 이전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질서가 성립되기 전, 모든 것이 ‘발견’되어 ‘기록’되기 전의 시대는 ‘어둠’을 허락치 않았다.


<태풍클럽>을 보면 밤이 깊어갈수록 덩달아 아이들의 축제도 심화되는 건 알 수 있다. 밤이 되고, 날이 밝아오며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많은 매체에서 사용하는 은유지만 영화의 속성을 떠올리면 어둠 안에서만 무언가 예외 상태가 가능하다고 보는 건 흥미롭다. 영화 안에서 소년성이 발휘된다면 이 세계는 단순히 보고 싶어하는 순간이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순간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힘, ‘착오’를 경험하려 하는 것이다. 일기예보의 사례에서 지적했듯, 영화는 얼마든지 현실을 배반할 수 있으며 여기서 ‘착오’가 생겨난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예상을 빗나갈 때, 우리는 자기만이 알던 정보가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살피려던 시도를 중단하게 된다. 영화는 일상에서 그런 착오를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과거에 사로잡지 않고서도 다시금 ‘외부’를 향해 자기를 노출하게 한다. 이 점은 영화에서도 촬영방식으로 확인되는데 영화에서 카메라는 무언가 안에서 공간 전체를 묘사하기보다는 철두철미하게 바깥에 머무르려는 모습을 보인다. 사건의 참여자가 되기보다 무대 아래 관중이 되기를 선택한 이 영화는 자신이 택한 것을 이 세계의 ‘내부’로 남겨두려는 것 같다. 마치 이 학교 안에서 벌어졌던 일은 아이들과 관객만이 아는 비밀로 남아야 한다면서 의도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다.


밖으로 알리고 싶지 않다면서 아이들을 무대 위로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작이 있음으로써 반대로 영화가 내부를 봉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터지지 않은 폭탄은 여전히 폭탄으로 남지만 한번 불이 붙은 심지는 영화의 종결과 함께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린다. ‘블랙박스’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돼, 우리는 자신이 방금 보았던 게 어떤 ‘사실’이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이제 남은 건 드문드문 남은 기억으로 재구성한 진실뿐이다. 영화 안에서 아이들은 어른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데, 어쩌면 이는 영화야말로 진실된 기억이라고 믿는 시선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잠시나마 어른의 책임이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어른은 여러 사실들에 묶여 결국 자신의 믿음과는 관계없이 길을 걷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은 아직 길 위에 오르지 않았고 그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다. 사전적인 의미를 따르자면 어른이란 무대에 오른 관중이고, 이는 곧 함부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반면 아이들은 무대 아래에서 극을 바라보고 박수를 치는 입장에 있어서 극을 주도할 수는 없더라도 이 세계를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 이 점이 <태풍클럽>이라는 영화가 그 자체로 현실에 대한 태풍의 눈으로 기능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의 이 영화는 어느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인 아이들의 모습에서 영화만의 가치를 발견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아이들이 수영장에서 다른 아이의 목을 눌러 물속에 잠기게 한다. 이내 정신을 잃은 아이는 응급구조를 받아 소생하는데 도입부의 이 장면은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는 일련의 과정인 것처럼 보인다. 관객이 영화 속 세상에 동의하던 하지 않든 간에 영화는 그들을 강제적으로 눌러놓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질식하는 관객이 있고, 애석하게도 삶이 계속되고야 만다. 한번 죽음을 경험한 관객들이 꿈의 세계를 마주하면, 이전처럼 더는 객석에서만 머무를 수 없다. 강제적인 몰입을 거치고 나면 관객은 자신이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현실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안에서 순간은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넓게 펼쳐진 무대로서 관객이 자기를 발견하는 장소가 된다. 이 점은 어른이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도 책임감이나 부채감을 느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해진다. 어쩌면 영화는 그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관객에게 강제적인 의무를 부여했던 게 아닐까. 도리어 영화를 볼 때는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를 되찾아야만 하는 게 ‘옳은’ 것이다. 영화가 아무런 사회적 책무도 지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영화가 말하는 블랙룸이란 말 그대로의 블랙박스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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