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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허락하는 한,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

<좀비딸>(2025)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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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딸>에서 유독 눈에 들어왔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정환이 수아의 방에 들어가 일기장을 열어볼지 고민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정환은 수아의 일기장을 바라보며 이를 열어볼지 잠시 고민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숏을 나누는 이상한 선택을 한다. 정환이 계속 다이어리를 응시하는 게 확실함에도 구태여 장면을 나눈 것이다. 그러니까, 이 분할은 사실 불필요하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 분할이 생각나게 하는 건 <너와 나>의 버스 장면이다. 일부러 빛이 번지게 촬영한 이 영화는 시선을 따라가면서 현실을 재배치할 요령으로 컷 분할을 사용한다. 같은 시선이 한 번의 분할을 경험하고 나면 관객들은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기준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찾게 된다. 이 세계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자크 랑시에르는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공통적인 것 안에서 각각의 몫과 위치를 정하는 한계설정,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드러내는 감각지각(sense perception)이라는 자명한 사실들의 체계’를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고 표현한다. <너와 나>에서는 세월호라는 공통 사건에 대한 감각과 그 안에서 개인들의 몫과 위치를 드러내는 게 컷 분할의 역할이었다. <좀비딸>에서도 다이어리를 둘러싼 컷 분할은 감염의 세계가 사람들에 안긴 감정과 흔적들을 따라 깊이 조응하는 감이 있다.


<좀비딸>에서는 정부가 감염자 수를 실시간으로 국민에 브리핑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모습은 코로나 판데믹 당시 보건복지부가 매일 국민에 감염자 수 동황을 정례보고 하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좀비 사태를 불명의 생물학적 재난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바이러스 개체명을 붙여 ‘질병’으로 진단하는 점도 그렇다. 이런 점들에서 코로나 판데믹 시기의 한국사회를 연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판데믹 초창기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위험성이나 전염성 등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감염자는 생활동선이 지역사회와 언론에 전파되기도 했다. 감염 사실을 숨기는 건 굉장한 위험으로 치부됐고, 감염자는 보건복지부에 ‘자발적으로’ 이를 보고함으로써 격리시설(혹은 자가격리)로 이동해야 했다. 원작 만화에서도 연재 후반 갑작스레 코로나 판데믹 상황이 펼쳐짐에 따라(2부는 19년 10월에 시작해 20년6월에 연재가 끝났다) 정환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를 알게 됐다는 몇몇 독자의 지적이 있기도 했다. 만화의 결말이 현실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환은 군대의 사격을 받아 사망하며 범법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법을 어겼으니 벌을 받는 건 마땅하다고나 할까.


판데믹 상황에서 감염 사실을 숨기는 건 이유를 막론하고 중대한 처벌 사유였다. 상황이 심각하던 2020년 2월 당시 대구에서는 시민들의 외출이나 타지역으로의 이동이 전면 통제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지역 간 이동이 통제된 건 광주 민주화 운동 사태를 제외하고는 없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안전을 위해 국민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일은 한국에서 폭력과 억압의 역사에 대치됐으며 이른바 판데믹은 시기의 ‘감금’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말해왔던 담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는 특히 한국 사회의 재난들이 대개 한 자리에 줄곧 머물렀기에 벌어졌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대표적으로 대구 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경우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어줄 것’을 당부했었다. 결과는 정반대로, 자리를 지켰던 이들은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으며 그 결과 ‘감금’은 한국사회가 남긴 오명을 그대로 답습하게 됐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판데믹은 명시적으로 ‘감금’이 안전한 상황으로 인식되는 최초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환이 줄곧 수아를 보호해오다가 오즈랜드에 데려가는 상황은 다소 뜻깊다. 정환은 수아에게 ‘바깥’을 보여주고 싶었다기보다는 그 자신이 미래를 그려보고 싶었던 듯 보인다.


정환이 수아의 춤을 처음으로 목격하는 장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있어. 우리 수아 살아있다고.” 이 대사는 배우 조정석이 출연했던 작품 <엑시트>를 연상케 한다. 도시에 재난이 닥쳐 파쿠르를 비롯한 기술을 응용하는 이 영화에서 조정석은 옥상에 올라 “여기 사람 있어요.”를 외친다. 19년 7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이후 끝나지 않는 판데믹 상황의 전초전이 됐다. 도시를 둘러싼 유해가스를 피해 옥상에 오른 두 일행이 ‘우리 살았어요’를 말할 때 고립의 상황은 희망에 찬 미래를 예고한다. 이에 힘입어 22년 10월 이 영화는 극장에서 4DX로 재개봉하며 관객들에게 판데믹 종결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영화가 놀이동산이라는 고전적인 비유를 받아들인다면, 오즈랜드는 극장에 방문함으로써 이 세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도 볼 수 있겠다. 정환도 오즈랜드를 통해 수아가 회복되는 미래를 그렸고 이 결말은 현실이 됐다. 영화는 현실을 예고하거나 할 수 없지만 반대로 이 세계가 회복되기를 바랄 수는 있다. 이는 단순히 영화가 아프고 다친 것만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관객은 그 모든 사건을 목격하고서 극장의 바깥으로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영화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영화 내내 치료제 개발이 예고되는 등 어느 정도 결말은 예측가능한 범주에 있다. 판데믹 시기에도 사람들은 언젠가 사태가 끝날 것을 잘 알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잘 몰랐다. 이 작품에서도 결국 놀이동산이 문을 닫는 시간은 정해져있다. 때가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 문을 닫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중요한 건 ‘어떻게 끝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으로 가는가’다. 이미 결말이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에서 영화는 유예된 시간을 갖고서 작업한다. 영화 초반에 수아는 차를 가져오겠다는 정환의 말에 “사망플래그 세우지 마”라고 답한다. 시차가 있지만 이 말은 영화의 결말에 실현돼 수아가 정환의 헌신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 점에서 영화에 해볼 수 있는 한 가지 가설은 영화가 이미 사후세계라는 결론을 정해두고서, 이를 잠시 유예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영화의 중반, 정환이 수아의 다이어리를 집어들며 컷이 분할되는 순간 이 세계도 이미 죽음의 안으로 포섭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탑건: 매버릭>의 도입부가 의식을 잃은 매버릭의 모습으로 시작되듯, 영화도 수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정환의 모습에서 출발한다고 말이다.


정환은 수아의 다이어리를 읽으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는다. 이 노트는 열리지 않지만, 결말에 가서는 수아가 정환이 기록했던 좀비의 습성을 읽는 모습이 비쳐지며 끝내 정환의 기억이 해금되는 방식을 취한다. 작중에서 정환이 강조했듯 ‘기억이 있으면 죽은 게 아니다’라는 말은, 반대로 아무런 기억도 없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기억에 접근하려는 시도의 부재가 죽음을 거부하는 상태일 수 있다는 걸 떠올리게 한다. 즉, 영화 중간에 정환이 수아의 다이어리 읽기를 거부한 건 수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도리어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수아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정환이 수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리는 게 아닐까? 바꾸어 말해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애도의 흐름으로 읽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미 죽은 것들을 돌아보는 일이 영화의 기능이라고 보면, 판데믹이 끝난지 2년이 흐른 현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들이 죽음을 말하는 가운데 정환은 “살아있어요. 우리 수아 살아있어요”라고 외친다. 공교롭게도 이 대사는 같은 배우인 조정석이 <엑시트>의 옥상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장면과 겹쳐진다.


영화는 하나의 기억일 수 있을까. 이따금 영화는 기록과 보존의 매체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을 지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영화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무언가를 말하는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이를 따라 한정된 시간으로 작업하는 영화는 ‘바깥’에 ‘살아있음’을 호소하는 매체였고, 이때 ‘감금’은 기억의 죽음에 저항하는 정치였다. 그러나 판데믹 이후 변형된 감금의 양식에서 ‘감금’은 타인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요구되는 공존의 태도로 이해된다. 이는 한 편의 영화에 담긴 기억들이 세상에 풀려나서는 안 될 무언가로 여겨진다는 점, 영화에 담긴 기억들이 느리게 죽어가는 ‘안락사’의 태도를 취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영화에 담긴 보존의 기능이 ‘바깥’을 향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바깥’을 돌려주기 위한 것으로 바뀔 때 영화는 애도의 매체가 된다. <좀비딸>에서 수아는 마지막 생존자로서 ‘바깥’을 위해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정환도 그 점을 잘 알아서 수아를 살릴 수 없다면 자신도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기억의 외부로 밀려나는 일은 주체를 항구적인 ‘감금’의 상태에 놓기 때문이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모든 것을 끝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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