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년은 스스로의 힘으로만 어른이 될 수 있다

<전지적 독자 시점>(2025)

by 수차미
1753425936352pvyJP.jpg

"딱 한 번, 영화가 촬영되는 현장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커다란 세트장에서 수많은 스태프들이 단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배우들은 같은 장면을 연기하고 또 연기했다. 같은 장면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같은 장면처럼 보였던 연기가 사실은 모두 다른 장면이었다는 것. 마치 회귀를 반복했던 유중혁의 삶이 실은 모두 '다른 인생'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싱숑(웹소설 원작자)-


“현장은 한 편의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죠. 아무리 각본이 좋아도, 현장을 잘 운영하지 않으면 영화는 실패합니다. 결국 현장은 단 한 번뿐인 시공간이기 때문에, 감독인 저는 매번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됩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中-


"영화사의 한 분기점에서 픽션은 다큐멘터리를 끌어들였다. 혹은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이는 화면에 부여된 구성과 편집의 연속적 논리를 파괴한다는 뜻이다. (...) 그들은 다큐멘터리의 장소에서 앞선 시대의 픽션적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영화라는 사물을 만지고 있다." -김병규, 씨네21 1516호 「우리는 함께 늙지 않을 것이다」 中-


<전지적 독자 시점>의 영화판은 원작의 몇몇 설정을 특징적으로 이용하는데, 그중 하나는 ‘불살의 왕’이다. 원작에서 불살의 왕은 역사를 두고서 벌어지는 왕좌쟁탈전에서 비롯됐으며, 이 쟁탈전에서 김독자는 왕좌를 깨부수는 획기적인 선택을 한다. 그 결과 왕좌쟁탈전은 전제조건이 무효화해 김독자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라는 칭호를 획득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누구도 지배하지 않으려’ 하면서 동시에 ‘누구에도 지배받지 않으려는’ 김독자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김독자는 한 이야기의 독자(讀者)이면서 한 사람의 독자(獨自)였다. 이 일화는 사람들을 동료로 포섭해나간다는 점에서 소위 ‘소년성’이 발휘되는 것으로 보인다. 소년만화의 주인공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거나, 미워하더라도 금세 화해해버린다. 이 세계에서는 우정이나 연대가 중요한 가치로 대두하며, 이들은 어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 해소한다. 이른바 소년성은 어른의 책임이 세계에 맡겨졌을 때 비로소 안에서 대두하는 가치다. 원작에서 불살의 왕은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말을 능력에 따라 실현하는 것이었다. ‘바깥’의 독자들이 작품 안에서 만큼은 안전하게 소년성에만 머무를 수 있게 해줬다.


영화는 반대로 어른의 세계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재계약에 실패한 계약직 김독자의 모습과 어린 시절에 학교폭력을 당하며 자신이 했던 한 선택을 느슨하게 겹친다. <오징어 게임>의 시즌1과 유사하게 경쟁사회의 모습이 짙은 폭력성으로 연결되며 유년기의 기억은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사지로 내몰았던 일과 엮인다. 이후 영화에서 ‘불살의 왕’은 역 안의 사람들을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제시되는데 이 과정에서 회고되는 건 첫 시나리오인 지하철 장면이다. 지하철에서는 생존을 위해 생명체 하나를 죽여야 하는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이때 김독자는 사람들에게 개미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때마침 같은 칸에 탑승해있던 회사 상사의 개입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실패해, 열차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야 만다. 여기에, 김독자의 첫 각성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그가 구하려 했던 할머니도 사망에 이르고야 만다. 결과적으로 김독자는 자기 혼자 살아남는다는 결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어른이 되려는 김독자가 어떠한 책임과 규율을 만들어보려 하지만 이에 실패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불살의 왕’은 바로 이 책임과 규율이 내면의 소년성을 죽이지 않는 일과 공존하는 일을 가리킨다.


‘불살의 왕’을 줄곧 언급하는 건 결국 영화란 책임과 규율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의 흔적으로 작업하는 매체인 만큼, 현실의 표면을 따라가야 할 책임과 규율에 얽매인다. ‘멸살법’이 현실에 구현되는 과정은 영화화된 <전독시>를 바라보는 시선에 겹쳐진다.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이 그러했듯, 김독자는 자신이 아는 결말을 따라가며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미리 구상하지만 이미 시나리오는 자신이 알던 것과 달라진지 오래다. 김독자를 멸살법의 세계로 이끈 작가 ‘tls123’는 “답답하면 결말을 직접 바꿔보라”고 말하는데 이미 영화의 참여자가 된 관객(=독자)는 시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미 영화는 자기만의 작법과 규칙이 있으며 ‘이야기’는 그 점에서 관객의 이데아를 충실히 구현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소년성’은 여기서 감독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타협이다. 어떻게 하면 이 세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도 사람들을 최대한 구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 <전독시>는 원작의 ‘오리진룩(OriginLook)‘을 충실히 이행했나.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다르겠지만 이미 ‘불살의 왕’이라는 호칭이 가리키는 ‘불살’의 뜻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이런 논의는 아무런 의미조차 없다.


영화나 만화엔 모두 표면이 있다. 이 표면은 장력을 갖고 있어서 외부의 이물질이 침입하더라도 일정 정도는 버텨낸다. 이 표면장력을 벗어나게 하려면 상당한 정도의 요인이 필요한데 우리는 이 순간을 ‘찢김’이라 부른다. ‘찢김’은 많은 경우 기념할 만한 순간을 남기지만, 반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으로 남을 때도 있다. 이를테면 영화와 현실이 뚜렷하게 구분돼 있다고 보던 중, 무언가 ‘찢김’이 벌어져 이세계 것이 현실에 침투해오는 때가 있다. 이 경우 영화는 창작물로만 이해되지 않으며 현실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 찢김에서 사람들은 아픈 현실을 떠올리거나 잠깐의 기쁨을 품에 안고 돌아선다. 이제 영화는 현실의 불순함이 섞인 무법지대가 돼버리고야 만다. 이 대목에서 김병규 평론가가 씨네21 1516호에 작성한 「우리는 함께 늙지 않을 것이다」를 언급해보고 싶다. 그는 이 글에서 “할리우드영화와 현대영화가 분리되는 지점은 화면에 개입하는 연출자의 자의식”이라고 말하면서, 이 연속성의 중단이 바로 다큐멘터리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포식자에 쫓기던 펭귄을 구하거나 하는 식으로 손길을 내밀었던 동물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말처럼, 자신이 포착한 ‘현실’과의 ‘찢김’에 영화는 점점 적응해나갔던 것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현실을 ‘포착’해야 하므로 이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장르적으로 보면 꽤 특수한 상황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런 불순함이 더 도움될 때가 있다. 가령 자전적인 성향의 영화를 제작할 때는 그 세계를 외부에 독립된 형태로 둘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독일 영년>의 사례는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지만, 이 영화에서 간과되는 것은 아이의 죽음과 함께 관객이 깨어난 세계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영화는 아이의 죽음에서 ‘찢김’을 발생시킨 후 그 안의 내용을 바깥에 풀어놓는다. 앞서 언급한 게 표면 안쪽으로 약간의 현실이 희석되는 경우라면, 이는 약간의 영화가 바깥의 현실에 희석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를 따라 영화는 다큐멘터리 성향이 짙은 영상물에서 한 현실이 바로 다큐멘터리이며, 이곳 어딘가에는 영화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전까지는 현실 어딘가에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 정도였지만, 이제는 현실 어딘가에서 이미 벌어진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독자는 이전처럼 현실을 살아감에도 무언가 낯선 곳으로 ‘귀환’한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무런 것도 바뀐 게 없는데 자신을 다시 이 세계에 ‘재배치’한 것이다.


‘찢김’은 깨어난 세계’로의 ‘귀환’이자 ‘재배치’다. 이 사실이 모던 시네마의 시작점이라면, 오늘날 작품 안에서 여러 표면을 넘나드는 일은 소위 말하는 ‘뉴제너레이션’은 아닐까. 윈도우 등과 같은 모던 GUI의 도입은 다양한 형태의 표면을 위 혹은 아래로 배치함으로써 2D 화면에서 3D의 깊이감을 줬다. 이에 여러 표면을 한 자리에 모아둔다는 작업대를 발상하게 됐고 이는 오늘날의 운영체제에서 바탕화면(Home)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바탕화면은 말 그대로, 기본 상태에서는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자주 쓰는 프로그램을 꺼내두거나 폴더를 만들어둘 수도 있고,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위젯 등을 올려볼 수 있다. 오늘날의 영화들에서는 표면이 단순히 내부와 외부로서 현실을 판가름하는 일에만 쓰이지 않고, 많고 다양한 표면들에서 사람들이 ‘찢김’을 선택하고 원하는 형태로 ‘재배치’ 될 수 있게끔 한다. 현실을 바꾸기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찢김’을 택하는 일은 어찌 보면 무기력함이나 자포자기의 심정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럼에도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이 상상은 몹시 중요하다. 자신을 특정한 장소나 위치에 두지 않아야만 비로소 영화들은 과거를 본래 있던 현실처럼 인식하거나, 미래를 곧바로 ‘의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독시>는 아무런 것도 바꾸지 않으면서, 원작에 동떨어진 세계로 인물을 데려다 놓으려는 시도의 산물인 듯 보인다. 굳이 원작과 파생 매체의 차이를 다룰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소년성이 가장 매력적이었던 캐릭터에게서 소년성의 판단 기준 자체를 개변해버리면 이미 그 소년성은 진의를 잃는다. 사실 <전독시>는 웹소설에 빙의하는 게 아니라 웹소설을 현실에 구현하는 쪽에서 반향이 일었던 작품이기도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원작을 갖고서 ‘영화적인 외관(FilmLook)’을 실현하려는 게 아니라 영화가 인간의 삶 안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 쪽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구도에서는 과거나 미래, 이런 영화들은 언제라도 현실을 찢고 들어올 수 있으며 이때 관객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경험을 한다. 즉, 자기반영성이 아니라 ‘자기반향성’이 대두하는 셈이다. 단순히 원작 소설과 만화, 영화가 모두 다른 작품이라고 보면 간단하겠지만 그런 정도라면 과거의 ‘나’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알지 못한 채로인 ‘나’ 자신이라는 말밖에 더 되지 않는다. 도리어 이 안에서 현실의 구조와 긴밀히 연결된 ‘책임’은 연출자의 자의식이 대두하는 찢김에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즉, 소년은 스스로의 힘으로만 어른이 될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초인의 패배, 인간의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