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2025)
영화는 ‘슈퍼맨이 첫 패배를 맞이했다’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후 새하얀 설원에 슈퍼맨이 날아와 처박히는데 얼굴 곳곳에는 크고 작은 상처로 가득하다. 이 장면은 슈퍼맨이 패배할 수 있고 상처 입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전개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적인 슈퍼맨의 모습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미리 밝혀둔다면 이 모습은 미국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시대상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미국이 마주한 첫 패배가 사실은 자신(울트라맨)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은 미국사의 첫 패배가 ‘9.11 테러’가 아니라 남북전쟁이었음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고 말하는 걸까? 만약 미국이 망한다면 내전으로 망할 확률이 더 크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이후의 도시 전체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는 일은 무엇보다 의미하는 바가 깊다. 슈퍼맨은 이 균열을 봉합하고 싶어한다. 이 균열은 사람들 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게 아니니까 사실은 세계적인 재난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기의 재난을 상대하는 모습은 인류세의 한 면처럼 보여서 언젠가는 한번 겪어야만 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렉스 루터가 미디어 등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가운데 슈퍼맨의 이 행동은 2000년대 초반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열차를 멈추는 성자’를 보여줬던 점을 연상시킨다. 2000년대 초반은 9.11 이후 벌어졌던 사회적 분위기가 미국을 지배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복수를 위해 ‘탈레반’을 침공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지워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에서 열차를 멈춰 세우는 건 거진 이런 시대상에 대한 ‘반응’처럼 보이는 면이 있었다. 폭주하는 열차를 막아 세운 후, 스파이더맨은 대중의 손길을 따라 마치 성자처럼 열차의 뒤칸으로 옮겨졌다. 한편으로는 앞서 있던 ‘슈퍼맨’ 영화를 하나 떠올리게 하는데 바로 <배트맨 대 슈퍼맨>이다. <배대슈>에서 배트맨은 슈퍼맨에게 “너도 피를 흘리나?”라고 묻는다. 이 영화가 앞서 말한 2025 <슈퍼맨>과 상반되는 내용을 다루기에 <슈퍼맨>의 첫 장면은 앞선 영화의 응답처럼 보인다. <배대슈>는 배트맨이 슈퍼맨을 비롯한 초인들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기며 약점을 공략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배트맨은 인간의 고결함을 잃으면 어쩔 것이냐고 슈퍼맨에 묻는데, 그 유명한 대사가 이때 등장한다. “우리 엄마 이름도 마사야.”
연출에서는 아쉬운 점이 분명 있지만 인간적인 것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점에서는 중요하다. 배트맨은 완벽한 존재는 실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만약 그런 존재가 인류를 실수로 규정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슈퍼맨은 자신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내면에 있던 결함을 치유한 게 바로 양부모의 존재라고 말한다. 그가 밝힌 이 일화의 핵심은 양부모와 함께하며 좋았던 일만 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 모두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말하는 것. 이게 슈퍼맨이 말하는 ‘인간성’의 조건이다. 배트맨은 슈퍼맨을 보면서 “그가 만약 이 세계에 환멸을 느낀다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한다. 이 상상은 곧바로 파국의 이미지에 맞닿으며 슈퍼맨과 같은 비대칭 전력을 견제하게 한다. 이에 슈퍼맨이 내놓은 답변이란 이렇다. “이 세상에 슬프거나 속상한 일만 있는 게 아니듯, 우리도 세계가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어야 한다”. 단 한 번의 실패로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슈퍼맨은 자신이 졌다고 해서 분해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덜 회복된 몸을 일으켜 세워서라도 다시 전장으로 향할 뿐이다.
영화에는 보라비아가 자한푸르를 침공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의 대통령을 비롯해 로이스 레인조차 슈퍼맨에게 “동맹국을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냐”고 말한다. 슈퍼맨은 이에 합리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고 이내 자리를 떠버린다. 이전까지 자기와의 대화만을 했던 그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논리의 결점을 찾아낸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테다. 분명 스스로가 생각했을 때는 정말로 옳은 일이었고 이를 믿어 의심치도 않았다고 말이다. “혼자서도 세상을 구할 수 있으니까….” 이 생각이 바뀐 건 영화의 가장 처음에 슈퍼맨이 맛본 실패 덕분이다. 이전까지 슈퍼맨이 혼자서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다면 이 실패를 기점으로 슈퍼맨은 점점 더 바깥을 둘러보게 된다. 자신의 완벽함이 깨어지고 나면 마찬가지로 이 세계도 더는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서 때로는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벌을 받을 때도 있다. 착한 사람이라 해서 무조건 좋은 환경을 누리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나쁜 사람이 더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다. 이제 슈퍼맨은 더는 이 세상이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장면에서 한 꼬마 아이가 슈퍼맨 마크가 달린 깃발을 힘겹게 세우는 모습이 보인다. 다른 무엇도 아닌 슈퍼맨을 부르는 이 장면은 한 캐릭터가 대변하는 국가적인 가치나 프로파간다를 넘어선다. 아이들이 세계를 여행하며 악당들을 물리친다면 어른들은 본질적으로 그 세계가 대물림되지 않도록 세계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아이에게 살아갈 장소를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살만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 슈퍼맨은 어쩌면 이런 세상 따위는 포기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었다. 슈퍼맨을 다루는 여러 매체에서 다루는 게 이 부분이지만, 이 영화는 이미 한 차례 실패를 선언한 바 있다. 슈퍼맨은 자신이 구하지 못한 것에 분해하며 이 세계를 환멸하기보다 다른 이에 손을 내밀기를 택한다. 지난 십년을 휩쓸었던 게 ‘대안은 없다’고 말했던 가속주의라면 이 장면에서 슈퍼맨도 바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화하는 재난 속에서는 그 어떤 이도 혼자서 세상을 구할 수 없다고. 결국 우리가 말하는 초인의 탄생은 실패로 돌아가고야 만다. 하지만 이 세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건, 반대로 완전히 망해버린 것도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살만한 세계는 살만하지 않은 세계 안에서만 이끌어진다”고 말했다. 그녀가 중요하게 지적하는 수행성은 이 영화에서 이렇게도 들린다. “희망을 말하는 일은 실패를 받아들이는 일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슈퍼맨의 첫 패배를 알리는 일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마치 한 세계의 회복을 바라는 방식으로 쓰인 것만 같다. 가령 이야기 작법에서 인물에 시련을 부여함으로써 이를 성장 요인으로 삼는 건 흔한 일이다. 영화에서는 슈퍼맨의 친부모가 남긴 메시지의 ‘뒷면’이 그 역할을 하는데 이는 중반까지 훼손된 채로 있다가 렉스 루터가 복구한 이후 그 본의를 드러내게 된다. 이전까지는 흠결무고한 메시지였지만 사실은 지구를 정복하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여기서 슈퍼맨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진 현실을 고치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메시지를 이겨내는 건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 점이 실패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패배는 실패와 동의어가 아니며,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에만 불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영웅 영화가 인물의 활약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고는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흔히 슈퍼맨은 완벽한 초인으로 소개되며 몸에 상처 하나 낼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곤 하나, 결국 슈퍼맨도 피를 흘리는 존재다. 그도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부당한 일에는 분노할 줄도 알며 가끔은 어리광을 부리고도 싶어한다. 그러니 처음 겪는 패배면 무언가 좌절감을 느낄 법도 한데 마치 이런 일이 꽤 흔하다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난다. 이를 따른다면 슈퍼맨은 이미 처음부터 완성형의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이 묘사에서는 인간성에 대한 무언가가 결여돼있다. 이를 대신해서 영화에 등장해온 건 인간의 신체이다. 신체를 지닌 존재라면 결국 인체의 피로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울버린의 최후를 다룬 영화 <로건>에서 세계는 점점 회복되어가지만 이는 로건의 노쇠함과 맞바꾼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슈퍼맨이 상처를 견뎌냄으로써 이 세계도 점점 희망을 얻고 있다. 이 영화가 슈퍼맨에게서 빼앗은 건 다름 아닌 온전히 개인으로만 남을 권리였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징으로든 뭐든 죽을 수 없다는 건 정말로 가련하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