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 유어 아이즈>(2024)
<클로즈 유어 아이즈>(이하 클유아)의 한 장면, 밤이 드리운 가운데 버스 안에는 작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창가에 드리운 밤빛을 전등 삼아 남자가 읽고 있는 건 ‘열차의 도착’이다. 이후 화면이 양자전환되며 등을 기댄 남자가 서서히 눈을 뜨는 모습이 비쳐진다. 어느새 새벽이 되어 영화는 그가 내려야 할 차례임을 말해준다. 이 일련의 시퀀스는 영화의 첫 번째 시작점을 잠에 드는 순간으로 묘사하기에 영화를 마치 기나긴 꿈처럼 느끼게 한다. 영화를 한껏 꾸고 나면 다른 곳에 자신을 데려다줄 것만 같은 기분 말이다. 영화의 속성을 운송수단과 결합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영화의 다른 면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장소’다. 마르크 오제는 공항이나 터미널처럼 운송수단들을 비롯해 이들이 통과하는 지점들을 ‘비장소’라고 이름 붙였다. 장소가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가 머무르며 발화가 시작되는 곳이라면, 비장소는 ‘이야기가 금세 휘발되면서 무언가 대화의 물꼬가 트일 리 없는 그런 공간’이다. 생각을 이어 가보자.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다. 영화는 어떤 순간들을 통과하는 지점을 제공하기만 해줄 뿐이며 진정한 ‘이야기’란 영화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관점이 있다. 이를 따르자면 영화는 어떠한 이야기로 건너가는 과정일 뿐이며, 정작 그 안에 이야기가 고일 수 없으므로 ‘내부’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요컨대 <클유아>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에서 출발하기에 도리어 ‘내부’를 끌어안는다.
미겔이 홀리오를 찾아 나서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남긴 촬영분이 시작과 끝만 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현실의 홀리오가 홀연히 ‘끝’을 마주하지 않고서 사라져 버린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중간이 사라져 버린 셈이다. 현실의 홀리오가 어떠한 출구에 나서지 않았기에 영원한 ‘열림’을 획득하는 반면 영화에서는 ‘영원한 ‘내부’로서 남는다. 즉 현실의 홀리오가 이야기로서 머물지 않기에 인물 사이에 추적되거나 회자될 수 없다면, 영화의 홀리오는 반대로 그 바깥의 홀리오를 돌아보게 하는 ‘지점’이 되어준다. 예를 들어 미겔이 홀리오를 발견한 곳은 어느 요양원이다. 홀리오는 기억을 잃은 상태여서 말 그대로 내부가 텅 비어있다. 필립 터렐이 자신의 미술 작업을 묘사하듯, 이 텅-비어있음은 사적인 기능을 잃어버리고서 공적인 작업으로 재탄생한 공간을 지칭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적으로 알던 홀리오는 사라지고 영화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 홀리오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제 그는 텅-빈 사내지만 반대로 ‘내부’로 존속하기에 사람들 사이에 끌어안길 수 있고, 또 끌어안을 수도 있다. 홀리오는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사람들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존재가 됐다. 그러니 영화와 현실, 둘 중 무엇이 홀리오를 기억하는 방식인지 고민할 새도 사라졌다. 여기에 남은 건 그저 화면 속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홀리오, 어느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일 뿐이다.
강덕구는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에서 “오늘날은 시작과 끝이 와해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면서 “빨리 허구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극장을 이탈해 벌어지는 영화들의 선형적인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영화가 영화로서 존속하는 게 우리가 현실에 있다는 인식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은 홀리오는 더는 영화로서 존속할 수 없다. 홀리오는 이제 더는 현실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때 그는 자신의 붕괴한 형상을 목격한다. 와해된 현실이 극장 안에 굳건한 내부를 바라볼 때 영화는 그 자신의 바깥을 세상에 돌려준다. 이제 미겔은 홀리오와 만나 그와의 추억을 받아 들게 됐지만 반대로 그를 영화로서는 바라보지 못하게 됐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홀리오를 보며 미겔은 자신의 영화가 아무런 것도 담지 못했다고 느낀다. 처음에 영화는 그 무언가를 담으려 했지만 이제 무언을 말하는 영화는 더는 세상에 기댈 수가 없다. 물론 이게 영화의 종언을 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영화에 물질적 유령으로 기입됐던 과거가 쇄신됨에 따라 그가 이 세계에 받아들여진 것뿐이다. 즉 영화는 종말을 이루거나 소멸된 게 아니며, 단지 이 현실에 내부로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이 ‘텅-빔’은 미겔이 내내 쫓던 홀리오라는 남자의 죽음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내부’가 영화에 자리 잡은 것에 불과하다. 시작과 끝이 있으면, 필시 여정이 있을 터인데 미겔은 그걸 잊고 있었다.
최근 톰 크루즈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을 홍보하는 자리에서 “나는 영화다”라고 선언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떠올릴 수 있는 장소성이 매체든 관객이든 간에 무언가 머무는 자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톰 크루즈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시리즈가 되어버린 <미션 임파서블>이 있고, 그런 영화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영화배우 톰 크루즈가 있다. 이 둘은 장소의 맥락에서 결국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성립할 수 있다. 관객들은 <미션 임파서블>과 톰 크루즈 모두가 자리한 바로 그곳에 앉아 있다. 마찬가지로 홀리오를 두고서 비장소라고 가정한다면 이는 결국 영화의 장소란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기도 하다. 미겔이 홀리오를 찾아간 건 영화와 현실 모두가 자리한 바로 그곳이다. 그런데 그중 현실이 먼저 무너져버려서 현실이 영화의 자리에 흡수된 게 바로 <클유아>의 상황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홀리오는 자신이 잃어버린 모습을 영화를 통해서 확인한다. 물론,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현재와 비교할 과거가 사라진 자리에서 재생되는 영화는 늘 현장상황으로만 묘사되기에 배후 세계를 품지 못한다. 따라서 이 ‘내부’는 과거에서 미래의 자리에 이동해, 사람들에게 ‘진보’라고 읽힐 만한 행위를 제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접힘의 과거에서 열림의 미래로 이동하는 영화는 뒤를 돌아보는 일이 부재와 상실에 대한 복구 작업이 아니라 존재와 생성에 대한 소멸 작업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더는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오늘날 영화의 장소는 폐허다. 미겔은 홀리오에 대한 몇몇 추억들을 따라갔지만 이는 반대로 자신이 아는 홀리오를 차분히 잊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미겔은 어느 날 홀연히 자신을 떠난 친구를 궁금해하면서도 영화를 망쳤다는 배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미겔은 ‘오늘날’ 홀리오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자신이 알던 과거의 추억과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졌을지를 알아보려 했다. 그는 텅-빈 장소를 걷는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이었다. 영화의 안과 밖으로 홀리오가 존재하던 가운데, 어느 한쪽의 붕괴로 인해 이루어진 단일화는 ‘공적인 기능을 잃어버린 장소’를 연상케 한다. 이제 자신 아는 홀리오는 더 없고 단지 한 세계의 표면으로만 비쳐지는 홀리오만이 남았으므로 그를 영화로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는 영화의 자리에 대한 비평적인 탐구로도 읽힌다. 왜나하면 배은열이 말하듯 영화 비평은 감정을 따라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배은열은 영화의 장소성을 두고서 “극장이란 제도 안에 들어왔을 때 기준점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주고) 감정교육을 시켜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배우로서의 기억을 잃은 홀리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의 문제는 결국 영화로서의 기억을 잃은 영화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와 무관하지 않다. 공공연하게 스크린 위에서 어떠한 기억들로 말해졌던 ‘그’에게서 기억을 앗아간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다시금 눈을 감는 장면으로 돌아가자면 이 장면은 곧바로 동이 트는 새벽으로 이어지므로 영화를 어떠한 압제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영화의 안과 밖, 둘 중 어느 곳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어떠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그렇기에 중요한 몇몇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는 내부 시점으로 이를 논하는 게 옳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영화는 오히려 무언가를 창조하기보다는 도리어 휘발되어가는 도중에 있으므로 이에 관한 논의는 항상 이후 관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홀리오의 텅-빔도 두 사람의 추억을 마주 보며 위로하는 게 아니라 과거가 미래에 내비쳐지기 위한 공백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한 배우의 신체가 영화의 물질적인 형상을 구성한다면 홀리오도 마찬가지다. 이 맥락에서 홀리오가 영화에 들어서고 나오는 장면만이 남았다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미완의 상태로 끝난 현실의 홀리오가 완결의 상태로 존속하는 영화에 담겼다고도 볼 수 있을 테다. 즉 미겔이 홀리오를 기억하는 건 정작 그가 사라져 버린 덕분일지도 모른다. 삶의 내부에 풀리지 않는 이야기가 담겼다는 건 우리가 이를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자 언제든지 돌아볼 수 있는 ‘지점’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가 본래 시계열대로 촬영되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면 이는 그리 특별하지 않지만, 이는 영화는 결국 현실에 드리운 그림자일 뿐이며, 자리를 옮기는 것은 항상 관객임을 주지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