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너스: 죄인들>(2024)
<씨너스: 죄인들>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허락을 맡아야 집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뱀파이어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죽음을 마주하는 과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장례식은 다음처럼 진행됐다. 고인의 관이 장례를 위해 교회에 들어가려 할 때 안에 있는 수도사는 “누가 들어오려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후 고인은 왕족의 이름을 한 번, 속세의 이름을 한 번씩 말해보지만 “우리는 그자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라며 거절당한다. 그리고 세 번째 노크에서는 고인은 마침내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 맡는다. “오토, 한낱 죄 많은 인간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말이다. 이 장례 절차는 영화의 제목처럼 뱀파이어가 허락을 맡아 집 안에 발을 들여놓는 일을 ‘고해성사’로 이해하게 한다. 영화의 중반, 뱀파이어가 된 옛 지인들이 생전의 몇몇 우정들을 설파하며 ‘안으로 들여보내 줄 것’을 요구할 때 내부에 있는 이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약간의 설전이 오가다가 뱀파이어가 먼저 생전에 서운했던 일을 토로하는 데 그들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미 뱀파이어가 됐기 때문에 살아생전 고인과 있었던 사건을 치유할 수 없다. 즉 뱀파이어는 죄를 짊어지거나 하는 존재가 아니며 반대로 죄를 짊어질 수도 없다. 그렇다면 뱀파이어야말로 ‘죄’의 무게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까? 기독교에는 에덴동산 이후의 인류에게는 원죄가 있다고 보는 시선이 있는데 이를 따른다면 모든 인간은 이미 죄인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종류의 고민을 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해서, 고민하는 삶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즉, 뱀파이어는 아무런 고민이 없는 존재이기에 문제시된다.
뱀파이어와 주인공 일행이 서로 대치하는 후반 장면에서 뱀파이어측 우두머리인 렘믹은 ‘우리’에 합류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을 나열한다. 뱀파이어는 인간과 달리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다. 국가나 출신, 인종으로 서로를 나누지 않으며 기억이나 고통을 서로 나누기에 더 돈독해질 수 있다. 특히 렘믹의 말을 따르자면 KKK단이 이튿날 술집을 습격해 이들을 몰살할 계획으로,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사람들을 살린 것이라고 말한다. 뱀파이어로 살아가며 형식적인 ‘나’를 잃는 것과 인간으로 남아 ‘나’의 외피를 지켜내는 일이 이 자리에서 충돌한다. 특히 전자는 ‘나’의 범주를 늘려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는 흔히 연대의 가치로서 우리 사회에 전해져왔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려면 결국 ‘나’의 크기를 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뱀파이어는 작중의 주요 대립구도를 그리는 인종차별 문제에서 화합과 포용의 가치로 주목받는다. 렘믹은 자신들에 합류해서 KKK단을 선제타격하자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는 ‘행동’에 나서자고 말한다. 렘믹은 기억을 나눔으로써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두의 기억이 하나가 된다면 그중에 자기만의 것, 소중한 것은 사라지고야 만다. 인간은 자신에게 소중한 하나를 살아가는데 바로 그 범위가 확장되어버린다면 이 세계를 소중히 여길지는 몰라도 정작 ‘나’란 존재가 머물 곳은 사라지고야 만다. 즉, 세계 어디를 가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이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 되어버린다. 뱀파이어가 말하는 자유는 남들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반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런 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뱀파이어가 되어서도 이들은 여전히 노예로 남게 될 뿐이다.
초대받은 이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는 건 단순히 뱀파이어의 특성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만약 초대받지 못한 이가 불청객이라면 우리는 이를 걸러내고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대표적으로는 한 특성을 공유하는 폐쇄집단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KMDB에 쓴 글에서 김신은 “시네필 집단은 거대한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것’이나 ‘이것’처럼 불분명한 용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지적한 것이지만, 기실 이는 상대의 감정이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상대방도 자연스럽게 한 사실에 동조하고 있으리라 여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은 많은 경우 상대와의 엇갈림에서 반발심이나 냉소를 유발한다. 맞은편에 거울을 두고 대화를 이어가는 이 모습에서 우리는 의미 있는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느끼지 못한다. 차라리 뱀파이어는 거울에 비치지 않으니 그런 점에서라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뱀파이어는 상대방의 허락을 맡아서만 내부에 속하므로 혹시 모를 소통의 오류도 없다. 뱀파이어는 함부로 상대방의 거울 속에 침입하지 않으며 그 점에서 세기의 결벽증을 앓는 존재이다. 뱀파이어는 자신이 감염시킨 이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지만 반대로 그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만큼은 잊지 않는다. 애니의 말처럼 뱀파이어가 영혼이 몸에 갇힌 불쌍한 존재라면 반대로 이는 ‘우리’이면서 동시에 ‘나’에 관해서는 잊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 인간들은 특정 개체 값에 가치를 호소하며 문제의식을 요구한다. ‘나’를 구분 짓는 일에 관심을 두면서 정작 거울 앞에서는 자신이 아니라 한 세계 전체를 비쳐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이렇게나 문제가 많다고 말하면서 거울 앞의 ‘나’는 그저 거울 속의 세계에 속한 피사체로만 여긴다.
마크 피셔는 「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뱀파이어 성은 어린 학생들의 에너지, 불안, 취약함을 먹어 치우지만, 대개는 특정 집단의 (더 ‘주변적’일 수록 더 좋다) 고통을 학문적 자본(academic capital)로 전환하며 살아간다. 뱀파이어 성에서 가장 찬사를 받는 인물은 그 고통에서 새로운 시장을 발견해 끄집어낸 사람들이다.” 피셔의 이 말은 오늘날 성별이나 문화, 인종 등의 갈등 문제를 문화적 담론으로 치환하고 이를 한 부류의 학문으로 세우는 일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씨너스>의 상황은 피셔의 다음 말을 정확히 지적한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연대가 아니라 상호 간의 공포다. 이제 자신이 폭로되고, 비난받고, 살해당하리라는 공포.” 렘믹은 주인공 무리를 향해 “’우리’와 하나가 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안에서 기실 자유는 없다. 뱀파이어는 서로를 연결하지만 이 안에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연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연대는 상호호혜적인 관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표현이다. 자신이 먼저 나서 무언가를 전하지 않는다면 연대는 공멸의 지름길일 뿐이다. 가령 작품 중간, 집으로 들어오려는 뱀파이어들과 대화할 때 이들이 살아생전 서운했던 일을 언급하는 일을 떠올려보자. 집으로 들어오기 위해 허락을 구하는 과정에서 주인공 일행은 “왜 안으로 들어오는 일에 허락을 구해야 해?”라고 묻는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상대방에 손을 먼저 내미는 일에 별다른 절차나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뜻한다. 우리는 타인에 손을 내밀기 위해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하는 존재인가? 도리어 자신을 구하려고 타인을 몰아세우는 존재였던 게 아닌가. 렘믹의 “뱀파이어 성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계급과 다른 범주들을 뜯어 놓는 짓(dis-articulation)이다.”
“계급 의식은 미약하고 일시적이다. 아카데미와 문화 산업을 장악한 소부르주아들은 논의 주제가 떠오르기도 전에 그것을 사들여 막아버릴 수 있는 선취권과 미묘한 편향을 갖고 있고, 만약 논의가 발생하면 그걸 논하는 것이 끔찍하게 부적절하고 예의를 파괴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한다.” 피셔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체성 따위는 없으며 다만 욕망, 이익, 신분(identification)만이 존재함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말처럼 시네필의 자아는 이따금 현실의 ‘나’와 다른 무엇이 되고는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영화를 자신이 아는 한 현실의 몇몇 문제의식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안에서 영화는 자신의 현실과 실제 현실을 연결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고는 하지만 도리어 현실에 담론이 연결된 채로 이동하는 담론 경제의 산물이 되기도 한다. 마치 달러와 연동된 현대 자본시장처럼, 영화 문화는 현실과 연동되어 한 개인의 정체성을 갖고서만 탐사할 수 있는 상태로 변형된다. 그리고 이 안에서 영화는 특정한 정체성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마치 언어능력이 와해된 것처럼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라는 가치에 중점을 두다 보면 정작 나 자신을 잊고야 마는 일이 생각보다 흔한데 이는 계통에 속한 상대방이 ‘종적 특성’을 거부하는 일로도 이어진다. 당신은 한국사람이니까 내 말을 이해하지 않겠는가, 혹은 같은 나이 또래이거나 같은 성별이니까 이 감정을 잘 알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 그렇다. 우리는 이에 앞서 서로를 횡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공유지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을 추구함으로써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황무지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영화는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새미가 선택한 것은 한 정체성이 아니라 어느 욕망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