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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끝나버린 세계에 살기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2025)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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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는 어느 면으로 보나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단어다. ‘편안한 죽음’이라는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지만, 타인이 개인의 죽음을 방조한다는 비판이 일고는 한다. 한편으로 안락사라는 말은 그 범위를 넓혀보았을 때 다소 대중적인 단어가 되기도 한다. 가령 ‘죽음’을 생명의 의식 단절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회복보다 소멸에 무게를 둘 때가 그렇다. 생물이란 본디 무언가를 생산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일반적인데, 이에 반해 스스로 소멸하기를 선택하는 일이 그렇다.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안락사’라는 말은 오늘날 ‘느리게 죽어가기’라는 비난처럼 사용된다. 소진되어 가는 이들은 자신을 두고서 ‘안락사’라고 지칭하며 더는 회복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냉소주의자들은 더는 세계가 회복될 수 없다고 말하며 ‘느리게 죽어가는 단계’에 속해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어서 빨리 탈출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손으로 세계를 끝내는 ‘안락사’를 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을 보며 버스터 키튼식의 액션이 생각난다는 평이 있었다. 몸으로 하는 액션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라면 으레 등장하는 평이지만, 이번 영화를 보며 유독 들었던 생각이 있다. 그건 바로 육체에 관해서다. <미션 임파서블> 첫 영화가 나온 1996년에서 30여 년이 흐른 현시점에서 주연배우 톰 크루즈는 많이 늙었다. ‘늙었다’라고 표현한 건 육체의 노쇠함을 좀 더 사실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보통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시리즈 물은 주연배우의 개인사정이나 노화 등으로 작품 시점과 외부현실이 달라짐으로써 배우 교체가 이루어지는 게 대부분인데, <미션 임파서블>은 그런 일 없이 30여 년을 흘러왔다. 떨어지고, 구르고, 상처 입어도 죽지 않고 매화 등장해왔다. 이처럼 과격하지만 상처 입지 않는 육체가 바로 초기 영화를 구성했던 정서였고, 동시에 육체의 불사성이 임무 실패의 불가능성에 대입됐던 게 바로 이 시리즈였다.


임무는 성공할 것이다. 영화에서 톰 크루즈를 향한 세간의 평가가 그렇다. 영화가 처음 시작하면 나오는 나레이션은 톰을 ‘명령을 어기지만 어떻게든 결론(임무 성공)에 도달하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이는 영화가 지닌 불가침의 속성인 ‘끝’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작중 악당 AI가 제시하는 ‘종말’을 연상케 한다. 톰은 아프거나 다치더라도(명령을 어기더라도)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다. 주인공이 죽지 않으니까 영화의 마지막도 임무 성공으로 미리 예견돼있다. 이러한 선험성은 기실 AI가 “모든 것이 정해져있다”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이데거식의 선험성이라고 보아도 좋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할 수 있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즉 인간이란 ‘각오’한 존재이기에 도리어 운명의 주체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인물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목적에 도달하는 법은 다르지만 결국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관한 자기평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가는 매번 달랐지만 톰 크루즈가 자신을 “나는 영화다”라고 소개한 만큼 시리즈마다 보여주려는 게 확고했다. 가령 <미션 임파서블>의 유명한 장면인 천장 침투 장면은 육체의 탄력을 강조함으로써 위험하거나 아슬아슬함을 통과하는 시리즈의 매력을 관객에 각인시켰다. 바꾸어 말하자면 톰 크루즈는 그런 위기를 통과해서도 끝내 마지막 순간에서도 우뚝 서 있는 ‘생존자’였다. 톰 크루즈가 자신이 임무를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이 영화가 어떤 시리즈이고 어떻게 만들어져야 다음 시리즈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즉 톰 크루즈는 ‘각오’한 사람이었다. 톰 크루즈가 동료가 겪는 위기의 몇몇 순간들에서는 항상 선택이 동반되는데 이 선택이 바로 영화가 뒤를 돌아보는 지점이 되어준다.


반대로 AI가 말하는 종말은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순리대로 흘러가는 무언가로, 도리어 이야기가 순리대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결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선택권은 없고,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분기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저 매끈하기만 한 시간선을 형성한다. 그런데 톰 크루즈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항상 명령대로 행동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실망을 안겨다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해진 순서를 따라 한순간을 분기하는 게 아니라 한 순간을 위해 나머지 모두를 분기하는 사람이기에 그는 특별했다. ‘안락사’는 바로 이 대목에 침투해오는 개념이다. AI는 이 세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믿으며, 그 수행방식으로는 온 인류에 핵미사일을 발사해 공멸하는 일을 택한다. 하지만 이 계획에서는 수행주체인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설정되었는데 말하자면 그 또한 생물의 일종으로서 죽음을 회피하려 했다. 결국 AI는 인류를 안락사하려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AI가 단순히 코드뭉치에만 불과했다면 이미 세계는 멸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AI 또한 죽음을 잘 알았기에 도리어 톰 크루즈의 팀이 이를 막을 수 있게 됐다. AI는 자신이 안전하게 거주할 독립 서버를 원했고 이 쉘터가 도리어 그 자신의 감옥이 되고야 만다. 이 모습은 한때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묘사했던 것처럼 인간을 학습한 AI들이 ‘인간’처럼 죽음에 집착하는 일을 연상시킨다. 온라인에 있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음에도 구태여 물리적인 저장매체에 피신했던 건 무슨 이유일까? ‘육체에의 감금’을 택한 건 어쩌면 바깥을 구상해보려 했기 때문일 것 같다. 푸코의 말마따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던 셈이다. ‘바깥’을 모색하려면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매끈함에서 탈출해 안과 밖이 뚜렷한 육체의 감옥으로 들어가야 했을 테다.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육체로 들어가야만 반대로 그와 같은 죽음의 ‘바깥’세계를 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따라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이와 같은 ‘육체’가 ‘바깥’의 사유와 연결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존재는 사후세계를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계가 멸망한다고 믿어야만 그런 세계 이후를 모색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종말을 대비하는 이들의 모습이 안락사에 대한 갈망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의 죽음이 어떠한 선택 아래 있다고 믿어야만 비로소 한 세계에 대안이나 선택권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이 세계가 멸망하는 것도 막을 수 없다. 그 점에서 톰 크루즈는 오히려 주인공으로서 특수한 위치에 선다. 종말론에 사로잡힌 이 세계를 구할 법은 톰 크루즈의 말처럼 서로를 믿는 것,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을 하는 일이다. 그는 잘 아는 사람이나 익숙한 이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자신과 팀을 희생할 수도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운명을 마주하는 자리란 자신이 그런 죽음의 한복판에 들어섬을 인지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모리스 블랑쇼는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서야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고 믿었다. 톰 크루즈도 이 세계에 바깥이 있다고 믿기에 앞서 지켜야 할 내부가 있던 사람이었다. 내부가 있기에 바깥이 있다면 결국 톰 크루즈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팀원들을 믿는 것뿐이다. 실제로 그는 지킬 게 많은 사람이었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요원으로서 아무런 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그를 구성하는 유일한 정체성이 바로 요원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니 이들 관계의 중심으로서 ‘나’는 그들 바깥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바깥에 따라 규정되는 내부니까 당연히 그 정체성은 어떠한 결말을 가정하는 일과 맞닿아있다. 어쩌면 그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삶이 운명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에 가라앉은 잠수함에 침투하는 계획을 세우면서 그는 잠수병을 개의치 않아 한다. 급격하게 내려가고 올라오는 일이 동료에 의해 보완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자신은 반려견도 키우지 않는다는 악당과는 달리 그는 동료를 완전히 믿는다. 이들 악당들과 톰 크루즈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켜야 할 게 있다는 점이고, 마찬가지로 인간의 연대를 믿는다는 점이었다. 다시 영화의 초반으로 돌아가 이 부분을 되짚어보자. 이 영화에는 AI가 빌런으로 등장한다. 다만 AI가 빌런으로 등장했던 지난 세기의 작품들과는 달리 별다른 인격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AI는 “대안은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도 “인간은 모두 악하다”라는 진부함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한 인간들이 끊임없이 ‘바깥’을 바라보고 향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맥거핀이라고나 할까. 운명론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모든 인간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다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나 선택들이 모두 다르다.


영화는 사후세계를 믿는다. 이 문장이 영화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안락사는 현재의 삶에 지쳤기 때문에 이를 탈출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해되고는 하지만, 사후에도 세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도리어 그런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막연하게 죽고 나면 그 수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시신을 수습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안락사를 택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자기살해일 뿐이다. 안락사와 자기살해의 구분되는 지점은 이를 통해 한 세계의 바깥으로 향하는지, 아니면 한 세계에 여전히 머무르는지다. 영화 내내 ‘AI가 지배하는 세계에 살거나, 아니면 모든 게 끝나버린 세계에 살거나’라는 물음이 던져지듯 ‘세계가 단 한 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고서 계속 삶이 이어지리라는 생각’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영화가 한 세계 안에서 사람들이 구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사람들이 종말을 마주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영화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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