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2025)
"우연성에 의한 상실, 또는 세계의 근본적 우연성이라는 근거의 상실에도 불과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믿으려 하는 것."
교황의 서거 이후 다음 교황 선출을 다루는 <콘클라베>가 개봉한 지 한달, 프란치스코 교황이 4월 21일 선종했다. 일반적으로라면 영화가 현실을 예언했다고 말할 법도 하지만 영화를 둘러싸고 그런 얘기가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 이건 영화를 현실에 빗대어 해설하려는 시도가 많이들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포스트 코로나 이후 더는 영화가 ‘현실’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됐다. 현실이 비현실을 압도함에 따라 현실보다 더한 영화 같은 건 사라졌다. 반대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건 오직 현실뿐이라는 점이 알려졌다. 미디어나 매체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서로에 말을 건네고, 전하는 일이 필요했다. 사람을 만나며 상대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우리는 그리웠다. 이 시기에 제작된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은 소문 속의 상대가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마주하는 영화다. 소문으로만 접했던 상대방의 모습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를 떠올려보자. 내가 알아왔던 그대로였든, 아니면 무언가 차이가 있든 간에 이 만남은 기존에 우리가 알던 이미지를 깨트린다.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사실상 본다는 일 자체에서 ‘있는 그대로’를 실현하지 못한다. 현실이 영화를 보는 일에 대한 비교기준이 되므로 ‘영화’는 현실에 앞서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이 <콘클라베>를 ‘예측’의 영화가 아니라 ‘재현’의 영화로 만들고 있다.
현실에 선문답을 던진 결과가 영화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선문답은 맥락에 들어맞지 않지만 질문을 한 이에게 깨달음을 준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현실을 따라가며 재현하지만 그게 항상 현실적으로만 풀어헤쳐 지는 건 아니다. 도리어 현실이 아니므로 질문자가 던진 물음이 ‘반문’이 될 수 있다. 영화를 거울에 빗대는 몇몇 이론들에게 변주를 주어야 한다면 아마 이쪽을 택할 것 같다. 영화에 나온 모든 것은 진짜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진짜는 아니다. 대개 사람들은 영화가 우연함을 뽐내는 것으로 ‘영화적인 것’에 대한 매력을 발산한다고들 하지만 사실 ‘우연함’이란 좁은 의미로 볼 때 ‘필연’일 뿐이며, 무언가를 확정해서 구분 짓는 일은 그와 같은 우연을 손에 쥐려는 일에 가깝다. 마치 이 세상에 네모난 벽을 둘러 우리가 보아야 할 이미지와 시야, 초점 등을 통제하는 게 카메라의 뷰파인더이듯, 영화는 ‘우연성’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시도한다. <콘클라베>는 이처럼 우연성을 배제한 결과로 ‘재현’의 영화가 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선대 교황의 진의를 밝히고자 봉했던 방 안으로 들어가 서류를 수집하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방문이 열리기 전까지 진실은 그저 오리무중에 불과했지만 그가 봉인을 깸으로써 의혹은 사실이 된다. 즉, 그가 행한 것은 이 콘클라베를 ‘예측’에서 특정한 결과값을 ‘재현’하는 일로 바꾸는 것이었다.
사실 종교란 게 원래 그렇기도 하다. 무언가 신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보다는 신에 대한 믿음이 세상에 드러났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니까. 그렇다면 영화도 결국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아니라 이미 알아왔던 세계를 그럴싸하게 구현한 것뿐인 건 아닐까. 영화가 말하는 ‘종교’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겪어왔던 것들의 그럴듯한 귀환으로 완성된다. 단지 영화는 우연성을 제거함으로써 그게 보다 선명히 드러나게끔 해줄 뿐이다. 이 세계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면 여기서 영화의 역할은 순수한 상상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가령 ‘우연’은 우리가 내심 무언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예측의 과정을 따른다. ‘영화’는 이러한 우연성에서 멀어짐으로써 우리가 한 결과를 스스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게 해준다. 어쩌면 이 기대는 자포자기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어떻게 하든 간에 이 세계는 순리대로 흘러갈 뿐이라고 말하면 모든 게 편해진다. 재현의 결과로 자신을 제시하는 일은 우리를 세계의 전선에 밀어 넣는다. ‘각오’한 자로서 산다는 건, 거짓된 행복으로서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도, 무언가로 선택되는 것도 답은 될 수 없다. 가장 온전한 형태로 이 세상에 남는 건 ‘나’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치는 ‘판단중지’에서만 가능하다. 도리어 세계는 설명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세계’로서의 완결성을 갖는다.
물론 영화를 설명하는 일을 중단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만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영화에 우연성을 들이미는 건 그저 현실을 성실히 베껴쓸 뿐이라고 고백하는 일에 불과하다. <콘클라베>가 보여주는 선거 과정은 외부에서는 내부 절차를 알 수 없이, 그저 모든 게 다 끝나고 나서만 굴뚝 위의 하얀 연기를 통해 알려진다. 이 모습은 우리가 영화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여기는 몇몇 블랙박스 속성을 연상케 한다. 처음에 영화는 암실에서 한줄기의 가느다란 희망에 반응함으로써 시작됐다. 사람들은 이걸 두고서 세계가 멈췄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기도를 올린 이가 바라는 궁극적인 한 세계를 확정 짓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콘클라베>에는 그런 대사가 나온다. “이곳에 모인 추기경은 누구나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 자신을 부를 이름을 생각해둔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이들은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를 위해 누군가는 봉해진 방문을 열기도 한다. 영화가 남기는 여운이란 그런 게 아닐까. 말로 풀어낼 수 있는 영화는 극장을 나오는 순간 무언가를 말하고 싶게 하지만, 숙고가 필요한 영화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이 경우, 몇 년이 걸리든 간에 영화에 대한 시선은 끝에 도달하게끔 돼 있다. 영화는 꼭 우리와 현실을 함께하는 것만은 아니며, 자신이 바라는 세계의 끝에서 먼저 우리를 기다린다.
분명하게도 <콘클라베>는 ‘영화’로서 자신이 한 세계가 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문제는 이 노력이 실패해 한 세계에 깊은 실망감을 내비칠 경우이다. 실패를 경험한 세계는 더는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걸까. 영화에 관한 슬픈 생각 중 하나는 실패를 떠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번 생겨난 영화를 이 세계에서 내치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미 이 세계의 시간 일부로 기록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한 세계의 구성원이 되어버린 영화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영화는 항상 후회를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만 이해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난 뒤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 세계를 이해해보려 한다. 대부분의 비평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총동원하고, 이게 가로막히면 모르는 게 있었나 하고 영화를 다시 본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결국 영화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맞닿는다. 자신이 앞을 바라보는 가운데 영화와는 등을 맞대어 서로를 그림자처럼 여긴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면 덩달아 영화가 세계에 드리운 부피도 점점 커져서 끝내 삶을 살아갈수록 영화를 이해하는 일은 점점 힘들어진다. 자연스레 경험했던 작은 실패도 큰 실패로 바뀌어버려, 영화에 대한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실패’했다는 점에만 잡아먹혀 버리고야 만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이와 같은 종속이 우연성을 제거한 건 아닐까? 이 만남은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고 또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었다고 말이다. <콘클라베>는 모티브를 따로 설정해두지 않았다. 따라갈 현실 같은 게 없으니 이 세계는 온전히 자유롭다. 원작과 본작의 관계를 다룰 것도 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이곳에 세계가 존재했다는 믿음 그 자체이다. 정작 자신이 무언가를 스스로 나서 주도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만 다뤄짐으로써 그 자신의 주체성을 잃고 있다. 하지만 우연함이 변화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는 걸 고려하면 우연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건 불가능하다. 희망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희망의 존재를 그릴 수 없다. 그러니 바꿀 수 없음에 저항하는 것, 그 실패의 다른 이름이 바로 희망이다. 이 희망은 희망을 좇는 이들의 마음에 잠들어있다. 희망은 어느 날 우연히 다가오는 게 아니라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순간들의 기적적인 발현이다. 아무리 헛되고 헛된 순간이라도 순간의 만남이 모두를 끝으로 연장한다면, 영화는 그런 만남을 꿈꾸는 이들에게 그럴듯한 순간을 제공함으로써 모두를 ‘끝’으로 이끈다. 그러니 <콘클라베>도 기묘하게 맞아떨어진 시기를 논할 게 아니라, 우리가 영화에 느낀 끌림을 당김으로 바꾸어보려는 시도로 읽어야 한다. 이 영화는 모든 우연에서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