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더볼츠*>(2025)
<굿 윌 헌팅>, 마음을 닫은 천재 청년에 관한 이 영화는 다음 한 장면으로 대중에 잘 알려졌다. “모두 개소리야. 네 잘못이 아니야.” 이 대사는 영화 안에서 발화되어 맥락에 통용되고 있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샌가 자신의 사적인 사연을 대입하게 되곤 한다. 영화 속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상황과 삶을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마음에 꽂힌다. 이른바 “영화에서 불필요할 정도로 영상이나 이미지가 정돈된 상태”가 있으며, “그렇기에 영화와 현실 간에 괴리된 사연들이 틈입해올 수 있다”고 정의하는 위생학이 여기에도 있다. 우리의 삶은 영화보다 항상 추하고 더러우며, 그래서 이를 ‘현실’이라고 부르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영화가 위생적이기에 모든 더러운 현실들이 갈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도 같다. 현실이 비참해도 꿈은 항상 반짝반짝 빛났다. 꿈의 진정한 의미는 터무니없거나 비현실적인 무언가를 구현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간에 말이 되게끔 하는 ‘독자’로서의 ‘위생’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굿 윌 헌팅>의 그 장면은 ‘아름다운 실패’로서 미화되고 또 긍정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썬더볼츠*>는 마블의 ‘굿 윌 헌팅’이다. 센트리의 과거를 마주하며 팀 구성원이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은 심리치료 클리닉을 보는 것만 같다. 센트리 내면에 깃든 ‘공허’가 도시 한복판을 잠식해갈 때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사연에로 빠져든다. 자신이 평소 외면하거나 잊고 지내던 아픈 기억에 감금되는 것처럼 묘사되는데 사실 이런 기억들을 ‘위생’적으로 분리해내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인다. 말도 안 되면서 말이 되게 하는 건 ‘위생학’이 지닌 특별한 장점이니 말이다. 특히 영화가 묘사하는 ‘공허’에 대한 몇몇 지적을 떠올리면 이 생각은 더 흥미로워진다. ‘공허’가 능력을 발휘해 사람들을 내면의 공허로 데려가는 일이 묘사되는 건 어린 여자아이를 썬더볼츠 팀이 상대할 때인데, 여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할 때 영화는 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만을 남겨버린다. 이 모습이 원폭 이후 증발해 그림자로만 남아버린 ‘히로시마의 그림자’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해당 장면이 ‘왜’ 오싹하고 기이했는지를 지적한 이 분석은, 영화의 내용과 전혀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감정만큼은 납득시켰다.
영화와 관련 없지만 외부와 연결돼 특정한 감정을 불러모을 요령으로 설정된 것, 유운성은 위생학을 그렇게 정의한다. 감독이 반전 메시지를 작품에 심은 것도 아니고, 독자가 떠올린 인상이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작중 센트리의 상황이 현실적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는 점이다. 통제력을 잃은 센트리는 내면의 인격인 ‘보이드’에 현실을 잠식당한다. 그리고 그 인격은 자신의 현실을 차분히 지배해가며 우울감의 영토를 넓힌다. 여기서 사람들을 잇는 건 행복이나 우정, 연대 같은 가치가 아니라 서로 고통스러운 감정들에 침몰해 자기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이런 부류의 연결도 ‘연결’이라 부를 수 있다면 기실 지지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에 내몰리는 일을 과연 연결이라고 볼 수 있을까. 타인에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공감과 연대라면 한계에 내몰린 이들이 서로 등을 맞대는 것도 자구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연결을 말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와 같은 위생을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은 전혀 무관한 것에 자기를 투영하기 때문에 사회를 꾸릴 수 있었다고, 즉 ‘무원’하기에 ‘무관’했다고 말이다.
“모든 이는 섬이지만 속으로는 하나의 대륙으로 연결돼있다”는 모 인용문이 있다.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지만 보편적으로 하는 고민들이 있다. 이 고민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사뭇 조심스러워서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서로에 대해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이 위생학을 추구하기에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고, 상대가 자신이 아닌 ‘타자’라는 걸 잘 알기에 도리어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영화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떠올리는 것은 각자 다르다. 그중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을 법한 이야기도 있다. 영화는 그런 이야기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박스 안에 담겨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끝을 정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사람들이 이곳에 있노라고 말해준다는 점에서 ‘무원’함을 그냥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 즉 영화는 당신이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무리 허튼 생각이라도 영화는 그게 있을 법한 일이라고 말한다.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인 것만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 안에서 당신은 “아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긴다. 마치 섬처럼 바다 위에 혼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때 영화는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믿는 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안에서 당신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당신은 그저 당신일 뿐이다. 당신과 세계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다. 당신이 겪었던 모든 일은 그저 우연일 뿐이다.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 영화적인 것에 불과했다. <썬더볼츠>를 구성하는 플롯은 결국 큰 틀에서 영화에 관한 자기진술이다. 서로 무관한 이들끼리 모여 서로의 영화적인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특히 센트리의 내면 세계에서 공허를 만나 대결하는 장면은 다소 직설적이지만 그렇기에 더 효과적인 위로법이다. 공허를 향해 주먹질을 하던 센트리는 ‘자기’를 위해 기꺼이 공허와 하나가 되려 한다. 주먹질을 하는 손 아래로 감정이 전파되면서 점점 더 자신의 현실을 잃어가게 된다. 이때 썬더볼츠 팀원들이 센트리를 등 뒤에서 끌어안아 그를 현실에 데려온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여기서 영화의 위생학에 대해 다시금 반문해보고 싶다. 현실과 무관한 것에서 어느 한 현실을 떠올리는 일은 합당한가?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이 진실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곳에 숨겨진 진실 같은 게 있을까? 영화가 말하는 ‘영화적인 것’은 정작 영화 안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쪽에 속해있다. 즉 영화적인 것과 영화는 서로 위생적으로 분리됐고 이 둘 간에는 물리적인 지시나 연상표가 없다. 이들 간에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연상 작업뿐이다. 그런데 영화가 결국 1초에 24프레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닿고 싶어하는 이미지들 사이를 연동하는 것도 결국 영화의 기능 중 하나다. 눈에 보이는 믿음 사이를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있다. 전자가 이성이라면 후자는 감성이나 직관에 가깝다. 누군가는 이를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말하면서 지양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영화는 얼굴을 대면하지 않아도 서로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우리가 꿈꾸는 것들을 현실에 구현하는 힘이 있고, 또 그 안에서도 세상이 여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영화가 실현하는 ‘예측’의 힘이란 게 그렇다.
물론 이 말은 ‘각오’하기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일반적으로 위로와 공감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기작을 발휘한다. 하나는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으니까 상대방을 자신의 한 ‘대체’로 여기는 일이다. 이는 어느 ‘한때’ 자신이었던 것과 자신일 수 있었던 것들에 공감을 발휘하는 사례다. 이 안에서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통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말한 위생학이다. 둘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영화’가 보는 이에 속한다는 걸 잘 안다. 영화의 위생학은 자신이 떠올린 것들이 결국 상상의 영역에만 속한다는 걸 잘 알기에 도리어 그런 상상들이 인간을 하나로 이어줄 수 있다고 본다. 즉 영화의 위생학은 도리어 영화야말로 무엇보다 현실적이며 그런 것들을 보며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상상적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현실을 어느 한 상상으로 대체하는 일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위로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이 느슨한 연결고리로 얽혀있다면, 사실 이들 사이는 그저 서로에 대한 작은 상상으로만 채워져 있는 게 아닐까.
이게 과연 ‘연결’이라 부를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청결함의 한 부류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만 살 수 없지만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 다가서도록 노력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실현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세계 전부가 무균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인간은 몸에 유익한 몇몇 바이러스나 병원균과 공존함으로써 생성과 지속을 이어갈 수 있다. “영화는 적절한 수준의 이물감이 없으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영화가 한 현실에 완전히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영화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의 ‘결말’로만 이해되고야 만다. 이 점에서 <썬더볼츠*>를 보며 떠올릴 수 있는 사실 하나가 더 있다. 서로의 아픈 기억들에 호응하는 이들 집단의 모습이 위안 자체에만 머무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고통을 정말로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일은 오히려 그 ‘영화’에 아무런 길도 열어주지 못한다. 단순히 한 세계가 일직선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해서 이게 고립무원의 위생학으로 나아갈 만한 이유는 없다. 도리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느 정도 깔끔을 떠는 일, ‘결벽증’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