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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낙폭, 세계의 너비

<해피엔드>(2025)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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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안에서 큰 세계와 작은 세계가 영향을 주고받지 않나. 캐릭터들이 같은 정도의 크기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보면, 육교나 교각에 대한 집착(fetish)이 있다. 그것들을 연결해 주는 볼트도.(웃음) 인간보다 큰 크기이지 않나. 영화 속에서 큰 구조물과 건축물이 나오는데, 거대한 지진이 온다면 모두 무너지게 될까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고가 다리를 좋아한다. 그게 정말 단순하고 솔직한 답이다. 그래도 논리적으로 말을 하자면, 이에 관해 촬영 감독님과 그림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와 같은 얘기 많이 나눴다. 그 결과 큰 구조물과 인물의 대비를 그리며 커다란 물질의 중량감 같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말 지진이 나서 저 큰 구조물들이 무너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그런 생각과 같은 것들."

-네오 소라-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문득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에 눈길을 던진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고, 시선이 2초 정도 짧게 머무른다. 고개를 앞으로 돌려보니 유타가 단상에 올라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저의 단독 범행입니다.” 영광스러운 졸업식을 앞둔 어느 날, 유타는 코우를 대신해 자신의 범행을 고백한다. ‘리허설’ 자리임에도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이 행동에 코우는 흠칫 놀란다. 리허설은 무언가를 미리 연습하는 단계가 아니던가? 코우는 평소 유타에게 ‘왜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지’를 물었기 때문에 이 행동이 사뭇 놀라웠다. 더욱이 코우는 교장에게 잘 보여야 대학 장학금을 받는 상황이었기에 유타의 ‘책임’이 더 와 닿았다. 유타는 코우 개인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모두에게 희망을 준 셈이었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들여다볼 만한 장면인 건 개인과 사회를 두고 대립하는 두 인물의 생각이 한 자리에 엮이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앞서 교장은 자신의 스포츠카에 장난친 사람이 자수해야만 ‘파노피’ 철회를 검토한다고 말했었다. 동시에, 스포츠카에 장난을 친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 확실했다. 평소 유타가 말했던 걸 생각하면 유타는 이들 사회가 아니라 코우 개인을 위해 나선 게 분명하다. 즉 유타의 생각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으며 졸업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육교 위의 계단에서 유타가 코우에 안녕을 고한다. 유타의 주먹이 코우의 심장에 닿을 때 영화의 숨이 멎는다. 프레임이 얼어붙은 그대로 영화가 끝나버릴 것만 같았지만, 이내 시간이 다시 흘러가며 영화는 마지막을 오롯이 배웅한다. 이 잠깐의 순간은 앞서 영화가 지진을 묘사하며 숨죽이던 찰나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기실 ‘지진’의 너비를 두 사람의 관계에 옮겨놓은 듯하다. 총리는 백년 만의 대지진이 올 거라며 위기를 강조한다. 지진 경보는 오보를 포함해 일상에서 꽤 자주 울린다. 지진 경보가 나면 카메라를 포함한 모든 것이 행동을 멈추고 사물의 아래로 대피해야만 한다. 여기서 지진의 속성을 떠올려보자. 지진은 단층의 끊어짐이 충격파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영화는 지진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마치 균열이 벌어지는 조짐처럼 묘사한다. 코우가 재일조선인으로서 비국민의 삶을 돌아보게 됨에 따라 친구들 간의 모임에도 소홀해지게 된다. 유타는 그런 코우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느냐고 묻지만 코우는 그런 유타를 탐탁지 않아 한다.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은 어른이 될 무렵부터 삶의 경로가 달라지게 된다. 코우는 유타에게 “이제 우리도 어른인데 언제까지 우정 놀음이나 할 것이냐”고 묻는다. 성장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역시 이 장면은 아이와 어른의 관계에서 ‘책임’을 묻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세카이계’의 문제의식을 두고서 “국민(성숙한 어른)으로서의 자각을 거치지 않은 미성숙한 개인이 곧장 보편과 연결되는 회로를 모색하는 것”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작중에서 수도 없이 언급되는 ‘비국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왜냐하면 평범한 일본 고등학생인 유타와는 달리 코우는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때문이다. 세카이계식으로 말한다면 코우는 어른이 되지 못한 채였고 그래서 더욱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만 18세를 앞둔 어른의 분기점에서 코우는 ‘국민’을 선택했다. 이처럼 서로가 갈림길에 설 때 벌어지는 ‘엇갈림’이 지진의 충격파로 변환, 영화의 마지막 결말에는 화면이 멈추게 되는 셈이다. 여기서 영화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얼어붙은 화면이 다시 재생됨에 따라 두 사람도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 암시된다. 엇갈림이나 오보 등의 문제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지진이 삶 전체를 끊어놓는 건 아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은 줄곧 친구로 남아있을 테니 아무렴 영화는 그저 작은 소동극에 불과하다. 물론 이것이 20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했다면 혁명이 실패했다거나 하는 식으로는 바라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우빈의 말처럼 이것은 레이와이며, 무엇보다도 ‘징후’가 지나간 뒤에 남은 깊은 경험이다.

벤야민은 “아이들은 무섭거나 충격적인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이를 놀이로 승화한다”고 적는다. 요점은 ‘똑같은 상황을 거듭 반복한다’는 대목으로, 어른들의 눈에서는 자칫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지만 아이 나름대로는 이를 놀이로 삼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를 작중의 음악 동아리에 대입하면 ‘음악’의 반복적인 리듬은 그 울림의 고동에서 현재와 이별하려 하는 힘, 단층의 끊어짐을 유도하려는 게 아닐까. 특히 크라카우어는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이 “관객을 무성 이미지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아무렴 이는 영화를 한차례 휩쓸고 간 지진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이 들리지 않는 세계의 한복판에서 아이들은 자기만의 여진을 반복하던 게 아닐까. 특히 이런 이해를 바탕삼아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면 클럽에서 발을 구르는 소음은 지진의 반복적인 소동과 분간이 되지 않는다. 즉, ‘혁명’은 이미 영화의 초장부터 시작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살펴보아야 할 건 ‘혁명’이 어떻게 놀이가 될 수 있는지, 또는 ‘놀이’가 어떻게 혁명이 될 수 있는지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분명 또래에 맞게 자유분방하게 웃고 떠들지만 어느샌가 ‘파노피’라는 감시 수단에 저항하게 된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외부 정보를 최소화함에도 혁명의 기운이 이들 내면에 스멀스멀 침입해온다.

혁명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단어는 보다 단순화해서 지칭되어야만 한다. 혁명은 무언가와 이별하고 무언가를 마주하는 사이의 간극을 가리킨다. 혹은 작중처럼 아이도 어른도 아닌 무언가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기로의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혼란기를 뜻하기도 한다. 아감벤은 벤야민의 혁명을 두고서 “장난감은 한때 성스러웠지만 이제는 더는 아니게 된 것들”이라며 그것이 어떠한 ‘간극’이 되는 건 그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대로라면, 코우가 음악 활동에 관심을 접게 된 건 그게 단순히 애들 장난 같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붙잡고 싶은 현실이 생겨났기 때문일 테다. 코우에게 과거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반대로 과거가 있기에 미래로 도약할 수 있다. 그래서 코우는 일본인으로서 귀화를 하는 것보다 대학을 가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코우가 주시하는 건 어머니가 말했던 “범죄 기록이 있으면 귀화하기 힘들다”가 아니라 교장이 말해왔던 “내가 장학금 추천권한이 있다”는 협박 아닌 협박이다. 졸업식 리허설 날 코우가 유타를 바라보며 생각했던 건 ‘범죄’ 사실을 혼자 뒤집어쓰게 한 일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교장이 자신을 추천할 수 있도록 퇴학당하지 않고 여전히 학교 행정 시스템 안에 남아있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다. 이는 평소 코우가 시위 등에 참여하면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해왔던 것과는 정반대다.

코우는 자신이 먼저 어른이 됐다며 유타에게 으스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2차 성징기를 겪는 아이들이 몸에서 어른의 징후를 발견하고는 이를 자랑스럽게 말하듯, 코우는 유타를 아이 취급한다. 그런 유타가 자신에 앞선 순간 코우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앞질러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유타에게 역전을 당하는 순간이 아니던가? 코우가 유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이 단층의 끊어짐이 자아내는 충격량은 적지 않다. 도리어 한 세계를 바꿀 만큼 운동량이 많을 테다. 그 점에서 지진이라는 재난은 속성적으로 볼 때 어떠한 사회문제를 다루는 태도와 닮아있다. 영화를 보면 근 몇 년간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감각들을 많이 수입해오려는 걸 알 수 있는데 가령 위기분위기를 조성해서 독재자가 되려 한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특히 ‘총리’가 아니라 학교의 지도자에 해당하는 ‘교장’에만 대항하는 위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지진이 올 것이라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누구도 풀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여기서 ‘독재’는 문제해결을 위한 추진기구가 아니라 한 사회가 얼마나 미숙한지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유년기에 머무르는 세계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물론, 그 서투른 봉합은 이 세계를 온실로만 가두어둘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진 못한다.

아이들은 이 작은 세계, 학교를 ‘전부’ 삼으며 이들 문제해결에 전력을 다한다. 마치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행동하며 교장을 독재자로 여긴다. 하지만 교사들조차도 지진 피해 알림에는 건물을 나서 대피하는 ‘세계’의 일원일 뿐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두고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이 연상됨을 지적하는 평자가 많았다. 태풍클럽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에서 ‘이후’를 발견하는 영화다. 같은 의미에서 유타와 코우는 졸업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갈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놀이가 한 세계가 혁명에 이르는 모습을 다룬다면, 그걸 믿을 수나 있을까? 점점 멀어지는 행성처럼 작은 생각이 큰 벌어짐으로 바뀐다. 거대함에 끌려 서로의 위상이 바뀌어 간다. 두 사람의 우정처럼, 한번 위협을 겪은 세계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피엔드>는 한 시대가 갈라서고 있음을 예리하게 관찰한다. 시선의 낙폭이 서로의 거리감으로 바뀌고, 생각의 차이가 세계의 너비를 실감시킨다. 이 중심에 음악동아리가 있다. 한 세계가 소년성을 탐미할 때 ‘바깥’은 어떠한 형태의 어른을 그리는가. 영화는 미성숙한 개인이 어떻게 하면 보편과 연결될 수 있는가, 즉 ‘영화’라는 현실 이전의 태동하는 세계가 어떻게 ‘보편타당한’ 현실로서 나설 수 있는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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