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의 편지>(2025)
<연의 편지>에 대한 악평은 개연성에 치중돼있다. 판타지적 요소가 학교폭력과 같은 요인과 나란히 배치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차용한 점도 문제로 지목된다. 철도가 지나가는 건널목이나 다양하게 전개되는 동아리 활동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활성화된 요인이다. 현관 쪽에 전화기를 배치해두는 일도 주로 일본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인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학교 앞에 깊고 넓은 숲이 존재하는 것도 ‘환상’에 가깝다. 경사가 있는 산이 아니라 수풀림 형태로 묘사된 이 장소는 ‘숲’하면 산이 떠오르는 한국 지형에서는 드문 풍경이다(일본식 숲이라는 소리다). 워크맨을 사용한 설정도 휴대전화의 부재와 함께 작품이 전개되는 시기를 모호하게 한다. KTX가 등장하지 않는 점을 근거로 2004년 이전일 것이라고 추측은 해보지만,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숲 속에 놓인 버스 안에서 한국 라면을 담은 박스가 스쳐 지나가는 등 간접적으로 한국적인 면이 드러나기는 해도, 전반적으로는 무언가 모호하고 혼재돼있다는 인상이 든다.
하지만 이 혼종성이 도리어 작품을 흥미롭게 하는 요인이 된다. ‘왜색’이라는 색안경을 빼고 보면 이 낯선 장소들이 이야기의 튀는 점을 바로잡아 전체적인 서사에 녹아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 정점을 찍은 건 온실을 운영하는 김순이 기사님이 마법을 쓰는 장면이다. 물속에 잠긴 7번 편지에 마법을 발동하는 모습은 이곳이 우리가 아는 현실은 아님을 말해준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인데 더는 사실을 물어봐야 별 의미 없다. 이런 판타지 위에 세운 이야기는 전적으로 서사에 집중하는 데만 소모된다. 큰 틀에서 보면 호연과 동순, 소리가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에서 가장 큰 반전은 호연이 보낸 ‘편지’의 대상이 소리와 동순 모두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소리는 처음에 자신의 자리에서 찾은 편지가 불특정다수를 향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던 중, 동순에게 쓴 편지를 발견하며 동순이 편지 찾기에 동참하게 된다. 편지의 수신인이 동순인 것으로 의견이 모이던 찰나, 9번 편지를 발견한 동순은 “이 편지는 병원 옥상에 관해 말하는데 자신은 그 이야기의 ‘바깥’에 있으니 네가 가보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학교 옥상은 담배를 피우거나 패싸움이 벌어지는 공간인 동시에, 성적비관 등으로 극단적인 선택이 일어나기도 하는 장소다. 그래서 옥상이 개방돼있는 경우가 많이 없는데 이 작품에서 ‘병원 옥상’은 이 두 가지 모두에 어긋나있다. 병원 치료에 지친 와중 무언가 숨을 돌릴 만한 곳에 되어주는 게 이들 옥상이다. 학교 옥상이 양궁부가 점유하는 공간이어서 동순과 승규의 갈등이 줄곧 이어지는 곳이라면, 병원 옥상은 ‘바깥’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다. 본편의 이야기 이전을 보여주는 곳이면서, 동시에 이야기가 맺음지어지기 위해 들여다보아지는 장소다. 이른바, 옥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분절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옥상을 기점으로 동순은 이야기의 내부자가 되고 소리는 바깥에 나아가게 된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던 동순이 진정으로 동료가 되고, 소리는 지난날의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한편으로 이 작품에서 옥상은 고저 차가 별로 없는 작중 무대에 유의미한 상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거의 없는 이 작품에서 가장 하늘에 가까운 곳이 바로 옥상이라는 소리다.
아이들은 이들이 몸담은 시스템 바깥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학년이 올라가 학교를 졸업하는 일 말고는 딱히 정해진 미래 같은 건 없다. 이런 한계 시스템에 저항하는 게 담론의 외부로서 ‘편지’의 역할이라면, 이 편지의 기능은 몹시 중요하다. 데리다는 편지가 전달되는 것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었다.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로만 목적지에 전달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따른다면 연의 편지를 따라가는 아이들의 여정은 단지 결말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행간’에 불과하다. 마치 리뷰 포인트를 얻기 위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어들로 채우는 리뷰와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즈마에 따르면, 이런 전달 과정에서 중요한 건 ‘오배’의 가능성이다. 우연히 잘못 전달된 편지가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정의를 따른다면 이야기의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온 동순은 소리가 편지를 병원 옥상으로 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오배’의 지점이었다. 만약 동순이 없었다면 호연과 동순만이 아는 몇몇 장소를 알 수 없었을 테고, 소리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때는 ‘바깥’을 모색하는 일이 어려웠다면, 병원 옥상에서는 그와 같은 내부를 벗어나 호연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동안 편지가 계속해서 전달되기만 했다면, 마지막에 가서는 드디어 그와 같은 구조를 벗어난다. 마치 이 편지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기로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행간’은 결말에 이르는 시간을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이를 아예 주저시키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이 행간은 다음 디딤돌로 가기 위해 더 높게 뛰어오르는 ‘순간’이다. 이 행간이 무언가 어긋나 보이는 개연성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더 높게 뛰어오를 수만 있다면 작품이 담보한 공간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이 올려다볼 하늘은 모든 것에 대한 ‘바깥’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와 같은 행간은 작품 초반에 소리가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소리가 학교폭력을 방관하지만 않았던 건 그것이 ‘같은 반’ 친구의 이야기였던 점이 가장 컸다. 다른 무엇도 아닌 같은 공간에 있으니 손을 뻗으면 쉽게 닿을 수 있겠다고 여겼다.
친구에 손을 먼저 뻗은 소리의 행동이 도리어 학교폭력을 당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아마 소리는 이 일에서 진심이 전해질 일은 없다고, 편지는 도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는 책상 아래에서 편지를 처음 발견했을 때 이 편지가 말하는 끝을 따라가 보려 했다. 이 일은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을 극복해보려 하는 시도였다. 소리는 새로 전학을 온 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싶어하지만 사회성이 약해져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만난 편지는 소리의 학교 적응을 돕고, 또 다른 친구를 만나게 해준다. 여기서 눈여겨볼 건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수평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학교는 동급생 간의 서열 관계에서 수직적인 면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작품 안에서 적극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원작 만화가 스크롤 형태인 만큼 무언가 수직 연출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작품은 항상 동일한 눈높이를 유지하려 한다. 이를 통해 세계의 굳기가 공연해지고, 그만큼 무언가 관성에만 머무르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를 따르자면, 작품이 시도하는 건 그에 대한 저항이다.
작품의 초반이 소리의 일화에서 이 눈높이의 실현이 좌절되는 일을 보여준다면, 이후 그녀가 구한 지민이 전학간 학교에서는 그것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민은 자신이 전학간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당하는 친구를 저지하는데, 전의 학교와는 달리 이번에는 반의 모두가 나서 그녀를 돕는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기 이곳에는 민중들의 이미지가 드러나고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티브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단역들에게는 항상 민중으로서의 ‘형상(Figure)’이 내포한다고 말하며 다음처럼 말한다. “카메라는 피사체의 얼굴과 전면을 프레이밍할 수 있는 기회를 오랫동안 놓치게 될지라도 그 피사체를 뒤따라간다. 그것이 무엇이든 예견하거나 명령하길 거부한다. 카메라는 ‘선취하지도’ ‘포획하지도’ 않는다. 그저 ‘뒤따라갈’ 뿐이다.” ‘잔존’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항상 잠재태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민중은 어떠한 세계가 저기 있음을 묵묵히 드러내는 요인이었다. 그렇다면 지민 역시, 아무리 도움을 구해봐야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점이 아니라 부조리에 일어서는 혁명을 믿었을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수평 이미지를 병치해 만든 시퀀스로 잘 알려진 영화다. 역사상 잘 알려진 이 폭력적인 일화는 이후 수병들의 함선 반란이라는 대사건을 예고한다. 역사적 사건은 단지 뒤따라 발견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보는 이 관점에서, 연의 편지가 따라가는 수평적 움직임은 여태껏 알아왔던 세계에 무언가 반전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다. 이 안에서는 그녀 스스로 무언가 손대거나 힘을 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소리가 친구를 구하려고 먼저 내밀었던 손도 학교 안에서는 손쉽게 좌절되고야 만다. 심지어는 학교를 떠난 뒤에도, 그녀는 학교의 긴 복도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을 탈출할 수는 없을 것만 같다. 그러던 중 그녀는 편지를 받는다. 편지를 따라 옥상에 올라가 동순을 만나고, 편지를 기다리는 존재에서 도래할 미래에 ‘지연’을 부여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 지연이 시대착오로 이해되지 않게 하는 게 바로 영화의 몫이다. 카메라는 세계에 뒤따르는 움직임으로써 항상 우리 삶의 그림자로만 남지만, 반대로 그건 우리가 빛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