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2025)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은 원작에 대한 흥미로운 영화적 가공의 산물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영화적인 연출을 선보여서가 아니라, 정지된 영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가공 때문이다. 만화를 영상화한 이 작품은 원작 <체인소맨>의 1부 중 ‘레제편’을 다루는데 극장판이라는 명목에 걸맞게 레제와의 만남과 이별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이 과정에서 덴지가 레제와 보냈던 몇몇 순간들은 시간을 따라 그가 떠올리는 추억의 크기에 더 잘 연결된다. 이른바 영화적 가공이란 시간을 따라 사건을 연루하는 기법이라고 보아도 좋다. 사실 원작 만화를 그린 후지모토 타츠키는 이미 영상 문법을 만화에 잘 수입하는 작가 중 하나였다. 원작부터가 이미 영화의 모습에 가까웠으니 이미 영화인 것을 두고서 ‘영화적’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가공했다는 표현만큼은 성립하는 데, 기본적으로 이는 ‘영화’가 활동하는 이미지의 형식을 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영화는 여러 장의 이미지를 빠르게 교차해 보여주는 활동사진에서 출발했던바, 특정한 순간을 ‘포착’한다기보다 그러한 순간들의 공백을 채워넣는 식으로 작동했다. 이는 즉, 영화가 한 개인의 마음을 채워준다는 점을 뜻한다. 영화가 한 개인의 삶을 시간에 엮는다면 이때 관객은 단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루는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이,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영화적 ‘가공’이란 바로 이렇게 이해의 측면을 따르기 때문에 시각적 이미지의 나열과 뚜렷이 구분된다.
<레제편>을 원작과 구분해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작 만화도 물론 좋지만, 영화는 이들 장면이 보여주는 감정들에 공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서 이를 보완하려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영화의 도입부에 있는 마키마와의 데이트 장면이 있다. 우선, 이 장면이 벌어지기에 앞서 요네즈 켄시의 ‘IRIS OUT’이 흘러나올 때 덴지가 평면화된 말을 현화해 탑승하는 연출이 있다. 영화에 대한 타츠키의 애호가 느껴지는 이 묘사를 보내고 나면 이후 마키마와 덴지는 영화관에 가서 온종일 작품을 관람한다. 아니다 다를까 덴지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 덴지가 슬금슬금 마키마의 눈치를 보던 가운데, 그녀는 덴지에게 자기도 사실 대부분의 영화가 취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로 재미있게 보는 건 열 편 중 한 편에 불과하지만, 반대로 그 하나가 나머지 모두를 넘어서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극장 나들이의 가장 마지막에 마키마는 덴지에게 ‘이 영화 한편이라면 나머지 티켓 값이 아깝지 않지 않느냐”고 묻는다. 덴지와 마키마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자신을 떠올린다. 이어 마키마는 한편의 영화가 자신의 나머지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일을 설명한다. 정말로 좋은 영화는 화려한 비주얼과 스릴 넘치는 전개가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자신의 얼굴에서 그 가치를 증명한다. 바로 이 설명이 <레제편>의 전부라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영화’는 마음의 공백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바꾸어 말하면 레제의 역할은 영화이며, 이 이야기의 결말이 헛된 것으로만 남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덴지는 레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는 모두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말한다. 이후 전투가 끝난 후에 해변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레제는 덴지에게 사랑을 연기했을 뿐이며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덴지는 레제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며, 여기 이곳에 있는 심장(장면)만큼은 진심이었다고 말한다. 이 묘사는 앞서 극장을 나오며 덴지의 가슴에 귀를 기울이던 마키마의 모습에 대한 수식언으로써 따라붙는다. 마키마는 전기톱의 악마인 덴지를 지배함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의 세계를 가꾸려 했다. 이 과정에서 엔진은 상처 입은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치로서, 구원을 부르는 신비의 고동으로 묘사된다. 이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오면 다시 상처를 재생해서 회복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녀가 영화에 기대는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마키마는 영화가 일종의 ‘회복’을 이끄는 도구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세계는 분명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부분의 장면들로 가득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반짝이는 순간 하나만큼은 있다. 모든 인간은 이 하나의 순간을 위해 질주한다. 삶의 대부분이 쓰레기 같더라도 정말로 단 한 장면이라도 건질 게 있다면 그 필름은 소장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전체가 순간을 대변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순간이 전체를 망쳐버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온갖 사악한 것을 체인소맨의 힘으로 끊어내고자 했던 마키마는 세상을 마치 영화처럼 여겼다. 그녀는 이 세상을 마음 가는 대로 편집할 수 있다고 믿었고, 장면을 위해서라면 나머지를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중요한 건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이에 채워넣은 나머지 모두다. 가령 <시네마 천국>의 결말은 편집과정에서 잘려나간 필름들을 한데 엮어 만든 자투리 장면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떠나간 영사기사, 알프레도를 추도하는 이 장면은 더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회복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나머지 본래의 순간을 부재의 자리에 불러오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이 세계가 다시 회복될 일은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나머지 공백들에 마음을 채워넣으려 한다. 이 불성실한 움직임이야말로 영화가 우리 세계를 모방하는 원리일 테다. 이미 다 끝나버린 것처럼 보여도 줄곧 살아가야만 한다. 영화는 계속돼야만 하고, 인생은 목적이 없어도 시간을 따라 흘러간다. 이처럼 <체인소맨>의 악마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피를 섭취하면 빠르게 몸을 회복한다. 삶을 향한 강한 의지의 표명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새까맣게 타버린 덴지의 몸을 붙들고서 피를 먹이는 걸 보면 그런 생각 따윈 싹 사라진다. 덴지가 살아나는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배고프면 먹고, 기분이 좋으면 웃고, 상대방에 반하면 꽃을 주는 정도의 단순함이 덴지의 전부다. 마치 영화가 이 세상에 나서는 원리처럼 악마들은 그저 시간을 따라 서서히 소생하기만 할 뿐이다. 마키마의 논점을 빌려 말하자면, 삶의 이유를 찾는 시간보다 이유 없이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때가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래서 덴지는 쉽게 사랑에 빠진다. 덴지의 꿈은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이 도시의 몫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보다 영화는 더 불성실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꿈을 위해 나머지 현실을 끊어내는 모습이다. 그는 우리의 삶에 안길 수 없지만 반대로 이 세계의 고통을 끌어안을 수 있다. 원작의 1부 중 마지막에 포치타와 마키마가 서로 대결을 앞둔 상황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포치타는 마키마에게 그녀가 만들려는 세계에 쓰레기 같은 영화도 있느냐고 묻는다. 마키마는 이에 재미없는 영화는 사라져야 마땅하다고 답한다. 두 사람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포치타는 영화에서 한 장면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나머지 모두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말한다. 마키마는 한 장면만 있으면 나머지 것들은 모두 편집해버려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후자를 따라가면 무언가 악몽에 시달릴 일도 없겠지만 모든 관계가 끊겼으니 상처를 회복할 수도 없게 된다. 체인소의 악마가 윤회를 끊어내듯 특별한 순간만이 있다면 이들 영화는 우리 내면에서 부활할 길이 없다. 도리어 잡다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쓰레기 같은 순간들이 있어야 그들 영화가 부활할 길이 열린다. 말하자면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영화의 기능(몫)이다. 체인소맨은 쉴 새 없이 죽어야만 하고 그만큼 또 시동 돼야만 한다. 운명 같은 영화 한편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본질적으로 시간을 ‘죽이는’ 여정이기에 또 하나의 세계에 살아날 길을 만든다. 이 출구가 바로 해방된 관객을 이끄는 곳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다니는 덴지에겐 반대로 도시의 꿈들에 대한 자유가 있었다. 시골 쥐와 도시 쥐에 대한 은유는 그렇게 읽어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목숨을 건 혈투 끝에 덴지가 레제를 끌어안고 바다에 빠진다. 헤엄치는 법을 알려주어 고맙다고 말하는 덴지는 물속에 가라앉는 게 아니라 그 안을 항해할 수 있게 됐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제 그는 도시의 고독에 포섭되기보다 남은 몫을 대신해 살아가기를 택한 것이다. 영화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비루한 도시의 생존자들이다. 꿈의 공장을 빠져나오는 노동자들이 화면 바깥에 사라졌듯이 극장을 나오는 덴지와 마키마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잃고 있었다. ‘자유롭다’는 건 가두어질 수 없다는 뜻이고, 그것 중에는 마음도 포함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덴지는 쓰레기 같은 영화 같은 건 없다고, 만신창이가 되어 버려진 삶은 없다고 말했을 테다. 인간은 시동이 걸리면 언제라도 되살아날 수 있는 존재다. 자의와는 별 관계도 없다. 영화는 우리의 삶에 있는 구동계를 마주하고, 이를 잡아당겨 죽어가는 삶을 되살린다. 이를 통해 고독의 생존자들은 다시금 세계의 밖으로 나설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품의 첫 시작점에서 왜 포치타가 덴지에게 꿈을 보여달라고 했는지를 알 것도 같다. 덴지의 꿈은 더 강해져서 무엇을 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유로워지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란 무언가에 구속받지 않을 권리이고, 그 범주에는 자신의 생각도 포함된다. 덴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그 어떤 생각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몸이 전기톱이니까 상대를 끌어안으면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여겨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이 생각없음은 그런 일들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몸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