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한이 끝난 세계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2025)

by 수차미
Infinity-Castle.jpg?w=1024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3부작으로 구성됐고, 제작 기간을 고려하면 적어도 2028년쯤에나 완결이 날 전망이다. 제작사는 작품제작 기간을 줄이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인력을 더 많이 고용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다. 여하튼 이 작품(1부: 아카자 재래)에서 중요한 건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러닝타임을 지녔다는 점이다. 155분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의 러닝타임인 149분과 유사하며 이는 곧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라는 뜻이다. 최후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다는 것. 그런데 이토록 긴 시간을 일반적인 공간에서 보낼 수 있을까? <무한성>은 어느 IP와 마찬가지로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종막을 맞고 싶어했다. 그래서 2시간에서 3시간 사이의 작품을 세 편이나 만들 계획을 세웠으며, 아마 이는 ‘실패’할 일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꺼낼 수 있는 구성이었을 테다. <무한열차>편의 흥행성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제작사와 배급사는 이 흥행보증 수표로 얼마나 ‘벌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본편의 이야기도 그렇다. 영화는 서로 다른 구역에서 전투를 치르는 구도로 이루어져 모든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게 돼 있다. 같은 시각, 다른 장소를 조명하면서 이들이 동시대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A의 루트에서 토벌이 이루어지면 B의 루트에서 곧바로 영향이 나타나거나 하는 식인데, 이런 구도로 짜인 플롯은 항상 비중을 나누는 일이 중요한 화두가 되곤 한다. 제작사는 최대한 덜어내는 이야기가 없게끔 시간을 벌어보려 했고 그 결과 러닝타임은 2시간을 살짝 넘긴 155분이 됐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찮아서 영화는 전반적으로 인물의 사연이 장면 간의 연계를 끊는 형태가 됐고 이는 등장하는 인물이 많을수록 점점 심해져, 작품의 절반은 회상 장면으로만 이루어졌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러닝타임을 늘리려는 시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런 건 영상으로 꾸리기에 원작 분량이 모자랄 때나 나오는 이야기이므로 <무한성>에 적용될 수 없는 비판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과 시간을 버는 것, 이들 간에 주고받는 영향이 약간은 있겠지만 전적으로 연동할 수는 없다. 단순히 시간을 편수를 늘리려고 장면을 늘렸다면 모를까, 가장 큰 축제가 될 최종장을 극장판으로 만들려고 ‘판단’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60여 분쯤으로 작품을 나누는 온라인 판본으로 제작됐을 경우 인물 개인의 서사에 더 집중할 수는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이에 시간은 더 ‘벌어졌을’ 것이다. 화려한 액션장면이 주를 이루는 이 작품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음’을 묘사하려면 반대로 작품 간에 사이를 벌려두면 안 됐다. 시간이 곧 자본인 사회에서 시간집약적인 극장판은 그만큼 자본집약적인 사업이다. 많은 수익이 들어올 게 예상된다면 그만큼 더 많은 투자자본을 갖고서 제작을 진행할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다시금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구조다. 이런 사업 구조에서는 무언가 판을 벌이려면 그만큼 틈을 좁혀야 하므로 ‘극장판’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 크다. 이미 성공할 확률이 높으니까 극장판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말은 그만큼 미래와의 ‘틈’이 무척 좁다는 뜻과 같다. 불확실성이 크지 않으니까 그만큼 확실한 의도를 갖고서 접근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벌인다’라는 말은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닌다.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일은 그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불확실함이 설 구석이 없음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바깥’은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을 버는 것’도 그러한 불확실함에 대응하는 성격이 아니라 내부를 무한히 확장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어쩌면 최종장의 무대이기도 한 ‘무한성’을 연상케도 하는 이 시도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게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매체가 말하는 ‘영역’이 무언가 경계를 갖고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내부’를 무한히 확장한다는 뜻에서의 ‘전개’임을 보여준다. 영역을 전개하는 일은 입국과 출국 등으로 물질교환을 막는 게 아니라 존재자의 위상을 밝히고 이를 외부에 발산함으로써 한 세계에 충만함을 전하는 일이다.


<무한성>은 무잔을 토벌하려는 귀살대의 총집합에서 시작해, 무잔과 대원들이 결투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다. 무잔은 상현혈귀를 내보내 독을 해독할 시간을 벌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각 인물의 ‘서사’가 그 틈을 메워주고 있다. 동시에 무한성 전체에 인물의 배치를 다양하게 가져감으로써 다양한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려낸다. 그 다양한 곳의 사건들을 하나씩 해치우고 나면 이 성 어딘가에 있을 무잔의 본체에 다다를 수 있다. 소위 말하는 ‘게임’의 형식에 알맞은 구조이지만. 한편으로는 내부 공간이 무한히 연장되기에 제대로 된 위치 선정이 불가한 관객들에게 너무 불리한 구조다. 작품 안에서는 유시로의 혈귀술이 이를 보완하지만 결국 등장인물이 아는 걸 관객이 모른다는 점에서 혼란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인물단에서는 아카자의 나침, 탄지로의 내비치는 세계 등이 등장하나, 이처럼 대상에 대한 이해가 마치 자석처럼 끌려오는 일은 관객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무한성>은 원작을 재현하는 일에 충실하지만 반대로 관객이 그걸 확실히 알고 있음을 전제하기에 그만큼 좁은 영역과 타겟으로 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생각해볼 만 건 위에서 말한 ‘번다’는 말의 속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쓸데없이 회상씬을 넣어 시간을 늘린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곧 돈이기에 “돈을 잃고 싶지 않다”는 뜻에서의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는 쪽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영화 내용이 중간마다 늘어지는 점과는 별개로 생각해볼 문제로, 오늘날 영화라는 매체는 처음부터 하나의 형태를 상정하고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한열차>편은 극장에서 먼저 상영을 한 후 전후 사정을 덧붙인 후에 TVA 형태로 작품을 유통하기도 했다. 이를 따른다면 <무한성>편도 극장 상영본으로는 중간마다 늘어지는 형태의 회상 장면이 TVA 형태에서는 적절한 형태의 완급조절이 될 공산이 크다. 매화마다 맺고 끊음을 선보이며 다음 화로 바톤을 넘겨야 하는 이 형태에서는 도리어 감정기복이 반복되는 편이 더 낫다.


만화의 영상화가 원작이 갖는 가능성을 시간을 따라 펼쳐두는 일임을 고려하면 적어도 <무한성>의 러닝타임이 길어지는 건 다양한 측면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긍정하려는 시도다. 작중 인물 개인의 서사는 지루할 수는 있어도 현학적이지는 않으며 어떠한 결말에 향하는 일을 최대한 지연하기만 할 뿐이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기를 끄는 IP를 계속해서 리부트하는 일은 수익수단을 놓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그만큼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디즈니의 저작권 법령 개정시도처럼 자사의 수익보전과 권리 행사를 위해 의도적으로 ‘잊힐 권리’를 지연시킬 수도 있지만 자신이 사랑하며 마주했던 것들이 마주할 최후를 최대한 지연시키려는 이들도 있다. 이 점이 <무한성>편을 살펴보는 데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작품으로서 <귀멸의 칼날>은 악인 포지션의 혈귀를 착하게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호평을 얻었다. 혈귀들이 아무리 구구절절 사연을 읊어도 탄지로는 그들에게 “지옥에 가라”고 말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서로 분리돼있으며 불쌍한 것과 나쁜 건 서로 다른 결로 바라보아진다. 이때 작품 안에 등장하는 회상장면은 그와 같은 죽음의 순간이 도래하는 걸 지연함과 동시에 ‘공’과 ‘사’가 서로 분리될 시간을 벌어준다. 한 IP가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아야만 수익을 낼 수 있기도 하지만 작품 안에서도 인물 개인의 사연은 작품 밖에 공유돼 관객이 그를 기억할 수 있게 한다. <무한성> 1부 ‘아카자 재래’에서는 제목처럼 아카자의 사연이 그런 역할을 한다. 특히 가장 긴 분량을 자랑하는 아카자 회상 장면은 그동안의 길고 긴 서사가 <무한성>편 전체에 대한 설명이기보다 아카자 개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다시 말해서 어차피 죽는다면 그런 순간이 다가오는 걸 최대한 지연해보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건 <무한성>편이 끝난 후에 <귀멸의 칼날>이 끝난 세계 이후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는 지일 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현실의 무게, 대체의 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