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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무게, 대체의 멜로

<우마무스메 신데렐라 그레이>(2025)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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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무스메 신데렐라 그레이>는 ‘프리티 더비’가 붙지 않은 첫 작품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사의 IP를 이루는 핵심 중 하나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우마무스메’는 의인화한 실존 경주마 캐릭터가 경주를 마친 후에 공연을 펼친다는 두 개 아이디어로 시작된 작품이다. 경마 팬덤을 잡으면서도 이를 어떻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것인지의 결과물이 바로 아이돌 장르였던 셈인데, 실제로 경주마는 인형 등으로 상품화될 만큼 인기가 있었으니 그야말로 우상(idol)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 원칙은 지난 2024년에 개봉했던 극장판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에서도 적용됐다. 당시 IP에 대한 이해가 없던 관객 사이에서는 “작품은 좋은데 왜 마지막에 노래하고 춤을 추는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왔다. 인물의 성장담을 보여주던 정통 스포츠극이 마지막에 가서 무언가 다른 노선을 타는 것처럼 보였을 듯하다. 하지만 ‘대체’를 다루는 우마무스메 IP 안에서 공연은 이미 세계 일부로서 ‘대체’될 수 없는 요인이다. 팬들이 IP에 애정을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니 작품의 분위기에 결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섣불리 뺄 수는 없었을 테다. 그러니 <신데렐라 그레이>에서 ‘프리티 더비’가 빠진 건 그 자체로도 주목할 만하다. 작품에는 경주 후 공연인 ‘위닝라이브’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공연에 대한 언급으로 세계관에 대한 약속은 지키고 있지만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 경주하는 모습에만 집중함으로써 정통적인 스포츠 성장물을 그려내고 있다고 표현할 만하다.


여기까지가 작품에 대한 일반론이다. <신데렐라 그레이>는 <새로운 시대의 문>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정통 스포츠극으로의 확장을 꿈꾼다고 말이다. 이 과정에서 언급해두고 싶은 건 중앙 트레센 편의 한 장면이다. 키사마츠 편을 마치고 중앙 트레센 학원 편에서도 오구리는 연승가도를 달린다. 이후 일본 더비를 노리지만 사전에 클래식 등록 신청이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좌절한다. 오구리는 계속해서 경주에 나가며 커리어를 쌓고, 세간에서도 그를 향해 클래식 참여 특별 청원을 내기도 한다. 이후 일본 클래식이 열리면서 오구리가 대회에 참여한 모습이 비쳐지고, 오구리는 2순위 주자와의 거리를 넓게 벌리며 결승선에 골인한다. 그렇게 1착으로 결승선에 들어오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절묘한 편집으로 엮인 것일 뿐 실제로 오구리가 출전했던 건 뉴질랜드 트로피 레이스(G2)였다. 화면 한편에는 일본 더비의 우승자가 그려지는 가운데 반대편에는 오구리가 그라운드에 홀로 서 있다. 관중석의 열광과 학생회장의 시선이 오구리가 아니라 일본 더비에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동안 묘사됐던 ‘우승’은 제3의 ‘대체’로 이해된다. “만약 오구리가 이 시기에 일본 더비에서 우승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가정이 성립하지만 끝내 이는 지켜지지 않는다. 창작물이라고 해서 만약을 가장하기보다 실제 현실을 따라갔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로만 읽히기보다 실제 역사에 얽힌 파생 상품 쪽에 더 가깝게 된다.


이 장면은 ‘우마무스메’ IP의 성격이 ‘대체’임을 고려하면 다소 특징적이다. ‘우마무스메’는 실존 경주마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의 말들을 동시기에 출연시켜야 하므로 어느 정도는 시간대에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따라 약간의 서사 변형이 허용되지만 그럼에도 실존 경주마의 삶은 ‘고증’이라할 만큼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편이다. 바로 여기서 ‘우마무스메’ 시리즈가 말하는 ‘대체’의 멜로가 발현된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두고서 “작품 안의 인물은 모르지만 작품 밖의 관객이 알고 있음으로써 형성되는 감정”으로 지칭한다. 이와 동일하게 실제 현실을 따라 펼쳐지는 인물의 삶에서도 유사한 효과가 나타난다. <신데렐라 그레이>의 기본 골자는 역시 실존하는 역사와 같다. 실존마로서 오구리 캡은 3세가 되어 중앙으로 이적했고, 2세에 사전 등록이 이루어져 3세 말들끼리 경쟁하는 일본 클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적한 오구리는 당시로써는 ‘지방’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는 존재였고 이에 언론은 “중앙을 얕보지 마라”는 뉘앙스의 언론플레이를 진행했다. 끝내 팬들의 청원은 오구리를 일본 클래식으로 이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후발주자부터는 지방에서 이적한 말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가능해졌고, 오구리는 후대 말들에게 길을 터준 셈이 되었다. 이하처럼 <신데렐라 그레이>에서도 오구리가 클래식에 진출하지 못하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그러니 모두가 그 결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데렐라 그레이>에서 오구리의 G2 경주는 어떠한 형태의 ‘만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 클래식에 대한 관중의 환호는 오구리가 직접 수행한 것이 아님에도 오구리의 G2 경주 1착에 대한 반응으로서 덧붙여져 있다. 잠시나마 ‘대체’로서 수행됐던 이 결과는 3초 남짓한 순간 동안 유지되다가 금세 파훼되어버린다. 오구리가 일본 클래식에 진출하는 미래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벌어졌던 이 현실은 지울 수 없는 현실이 되어 ‘거짓’에서 탈피한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말하는 것과 잠깐이라도 있었다고 말하는 건 하늘과 땅 정도로 그 차이가 크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적해 엘리트주의 아래 언더독의 서사로 진행되는 이 만화에서 ‘대체’는 당장이 아니더라도 먼 미래에는 실행될 수 있는 가공의 현실이다. 특히 만화는 오구리의 클래식 출전이 불발되었음을 알리면서 루돌프 회장이 앞으로의 미래를 보답 받는 장면을 통해 미래의 수혜자를 화면에 등장시킨다. 전작인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ROAD TO THE TOP>에서 등장했던 티엠 오페라 오가 그 주인공이다. 경마 역사에서 1999년에서 2000년대 사이 활약해 ‘세기말 패왕’으로 불렸던 티엠 오페라 오의 커리어는 사실상 1980년대 후반에 활약했던 오구리 캡이 있어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를 따른다면 이 장면은 오구리 개인의 서사만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의 ‘대체’를 기입할 수 있는 틈이 되어주는 데, 이는 역시 극장판 <새로운 시대의 문>과 관련 있다.


<RTTT>가 다루는 시대 배경은 티엠 오페라오가 활약하던 2000년대 전후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문>은 주역인 아그네스 타키온과 정글 포켓 등이 활약했던 2001년 이후를 묘사한다. 시기 상으로 보면 <신데렐라 그레이> 이후 10년 뒤를 <RTTT>와 <새로운 시대의 문>이 넘겨받는 모양새다. 말하자면 <신데렐라 그레이>에서 오구리의 ‘대체’는 작품 내에서 소화되고 있기보다 이후의 세계에 바톤을 넘겨주는 모양새다. 특히나 이는 <새로운 시대의 문>에서 타키온이 다리를 다치지 않은 ‘대체’현실로 나아가는 점과 대비해 수미상관을 이룬다. 이를테면 2000년은 ‘새천년 문제’ 등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신세기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지와 같은 고민이 진지하게 이루어지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 ‘미래’는 현실이기보다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기 일쑤였고 그만큼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통칭 ‘새천년이 열렸다’라는 말은 장소적인 의미에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인식의 ‘바깥’으로써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엠페라 오는 오구리가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미래로 나아간다. 오구리에게 그것은 상정 외의 문제였지만 이 문제는 훗날 엠페라 오가 미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니까 <신데렐라 그레이>의 진지함은 이들 작품들에 대한 ‘현실’로서 ‘발판’이 되어주어야 했기에 요구됐다고 볼 수 있다. <신데렐라 그레이>는 우리에게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미래’를 엿보게 해주었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보면 ‘우마무스메’란 명실상부 ‘대체’가 중심을 이루는 작품군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의 마지막에 타키온은 실존마의 생에 존재하지 않던 미래를 맞이한다. 본래라면 다리가 골절 당해 죽음으로 나아갔어야 할 미래는 여기 이곳 현실에 ‘대체’되고 없다. 한편 TVA의 1기와 2기에서도 사일런트 스즈카와 토카이 테이오를 화려하게 부활시키면서 주요 인물을 ‘바깥’으로 이끌었다. 실존하는 역사를 따라가며 어떠한 결말을 맞이할 것으로 예측되던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체’ ‘현실의 바깥’이라는 매체의 역할을 독톡히 수행한다. 가령 우마무스메 IP가 신세대에 일본 경마에 대한 관심을 끌어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면 이는 ‘잊힌 것에 대한 부활’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원본을 가상으로 교환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발판을 두고서 이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에 언제나 현실주의의 인상에 사로잡혀있다. 이 과정에서 원본을 왜곡하거나 사실과 다르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본래 동선에 대한 ‘바깥’으로서 이를 상대하기 때문에 도리어 현실은 더욱 완고한 현실로 남는다. 작품 안에서나 겨우 꿈을 이루었다고 보기보다는, 반대로 현실의 무게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아름다운 것은 가상에만 남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 세계가 현실을 이겨냈기에 더욱 혹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반대로 현실의 무게를 짊어지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신데렐라 그레이>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여기 이곳에 선 한 현실, ‘대체’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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