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토 타츠키 17-26)(2025)
작품을 접하는 순서에 따라 감상이 달라질 때가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 17-26>은 그런 부류 중 하나다. 작품을 그린 나이에 따라 넘버링 한 원작은 17에서 26이라는 나이를 얼추 가늠케 한다. 자연스레 나이를 따라 만화의 질도 올라가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데, 가령 자전적인 내용이 담긴 단편 <룩백>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쿄모토는 후지노에게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며 “선생님의 만화는 3학년과 4학년 때는 이런 이런 만화가 좋았고…5학년과 6학년은 모든 만화가 신이었어요”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단편선>도 22살에서 26살을 다루는 파트2가 기술적 완성도는 더 높다. 영상화된 파트1은 파트2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시각화하는 부분이 화려하지 않아서, 무언가 그림적으로 덜 다듬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17살 때 그린 만화랑 26살 때 그린 만화가 같으면 그거대로 문제라고나 할까. 영상이 무언가 느슨한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겠지만 아무쪼록 한 사람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파트1의 마지막에 자리한 <시가쿠>는 영생을 사는 흡혈귀와 킬러 여자아이의 로맨스를 다룬다. ‘사각’을 뜻하는 이 단어에서 우리는 만화가 제공하는 사각형 틀의 ‘바깥’을 떠올리게 된다. 이 단편에서 흡혈귀의 목적은 그녀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이지만 이는 금세 실패한다. 다만 그녀의 엽기적인 애정이 흡혈귀의 마음을 흩트려놓았고, 따분함에 질려 하는 그는 ‘그녀’를 흡혈귀로 만들며 행복을 찾는데 성공한다. 이 단편을 보면 아무쪼록 <룩백>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럼 후지노, 넌 왜 그림을 그려?” 그림을 그리는 건 지루하고 따분하지만 그럼에도 수고를 감내할 만하다. 어쩌면 흡혈귀에게도 그녀는 그런 수고를 감내할만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흡혈귀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일상의 모든 게 틀 안에 박혀있었다. 그런 와중 만난 그녀가 ‘바깥’을 선물해주었다. 분명 그림을 그리는 건 수고롭고 번거롭기만 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꼭 미래를 정해놓고서만 이를 대하는 건 아니다. 미래는 사각지대이니 말이다.
<룩백>에서 후지노와 쿄모토는 콤비를 이루어 미성년의 나이에 단편을 7개나 기고한다. 학생 시절에 잡지에 단편을 기고한 그의 경험으로는 무언가 ‘짧은 순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작품 안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장면이 여러 시계열에 혼성되는데 대표적인 것은 <안녕, 에리>에서 등장하는 폭발이다. 여기서는 물리적인 형태의 폭발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앞서나가는 부류의 것도 있다. 소위 말하는 웃긴 얼굴이라거나, 분위기를 어긋나게 하는 식의 과잉은 소위 츳코미라고 부르는 일본식 만담에서도 벗어나 있다. 오히려 ‘착오’라고 불리는 불시착의 모습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를테면 충격을 받은 사람이 멍하니 있다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그러한데, <룩백>의 마지막 장면이 대표적이다. 쿄모토가 그린 네컷만화는 범인에 발차기를 한 후지노의 등 뒤에 곡괭이가 꽂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끝난다. 여기서 ‘등 뒤를 봐’라는 대사(작품의 제목이기도 한)가 등장한다.
만화의 핵심은 후지노가 ‘나오지 마’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으로 쿄모토와의 ‘만약’을 상상하는 후반부다. 이 장면에서 후지노는 잠시나마 ‘바깥’을 엿보지만 이내 갑갑한 틀 안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자신이 상상해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 만화가 후지노를 일어서게 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등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후지노가 쿄모토에 해주었던 등 뒤의 사인이 있다. 아마도 여기서 후지노는 폭발이 한 사람의 삶을 망쳐놓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만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하면 무언가 이상한데, 만화를 보면서는 정작 느껴지지 않는다. <뒤뜰에는 두 마리 닭이 있다>나 <사랑은 맹목> 등, 짧고 굵은 전개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이것들은 작품 하나하나로 기억되기보다는 무언가 큰 총집편 안에서 하나의 얼개로 이해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차분히 그림을 그려가다 보면 이 이야기가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이름 아래 어떤 ‘바깥’을 보여줄지를 말이다.
<룩백>의 원리를 따른다면 이는 한 사람의 노력이 그림에 반영되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작품에서 후지노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 쿄모토는 배경을 하는 사람이다. 후지노가 쿄모토의 ‘현실’을 부러워하면 쿄모토는 후지노의 ‘만화’를 동경한다. 이 흥미로운 설정은 정작 두 사람에게 상대방의 것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입맛을 돋운다. 쿄모토는 현실 묘사를 잘하지만 반대로 현실을 살아가는 쪽이 아니다. 후지노는 상상력이 좋지만 반대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 후지노는 만화가 허락하는 정사각형 틀 안에서만 자신의 생각을 가둘 수 있고, 쿄모토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 안에서만 만화를 그릴 수 있다. 이른바 두 사람 두 사람 간에는 서로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바에 대한 ‘착오’가 존재한다. 자신의 주요 현실과 상반되기에 도리어 ‘꿈’만 같은 무언가가 되는 게 바로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항상 특정한 부류의 간극으로 작동하며, 실패인 듯 여겨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동일한 ‘바깥’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바깥을 등지고 서로 같은 내부를 바라볼 때 세계는 무척 좁다. 흥미로운 점은 후지노가 쿄모토의 방문을 열기 전에 작품이 변위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후지노가 찢은 네컷 만화의 일부가 과거의 쿄모토에게 전달되고, 이를 받아든 쿄모토에서 대체 현실이 파생된다. 이후 쿄모토에 의해 구해진 후지노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구해준 후지노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는데, 이 만화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후지노에게 전해진다. 만화를 보며 ‘뒤를 봐’라는 마지막 문구를 읽은 후지노가 문을 연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그녀는 문을 열고 있지만 이 문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놓여있다. 문을 열어 방 안을 보는 건 과거에 미련을 두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을 연 곳, 방 안을 가로질러 널린 네컷 만화들 중 방금 풀려난 한 곳이 비어있다. 그녀는 빈자리에 서서, 주변을 한껏 돌아보다가 다시금 문을 바라본다. 이제 그녀는 못다한 미래를 마쳐야만 한다.
‘후지모토 타츠키 단편선’은 말 그대로 쿄모토가 수집한 후지노의 교지 만화 단편선처럼 기능한다. <체인소맨>의 1부에서 주인공 덴지는 문을 열고 나서는 일을 두려워한다. 문을 나서는 일은 다른 어딘가로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등진 기억을 마주하는 일로 묘사된다. 이는 문제를 피하려 든 게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배경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유의깊다. 무대에서 배경은 인물을 서사에서 구분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 배우에게서 ‘등진다’는 건 그 시대에 몸을 담는 것을 뜻한다. 이런 뜻에서 <후지모토 타츠키 단편선>은 별개의 작품이기보다 한 무대에 올라온 배우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성적인 코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는 방식이나 무언가 사고가 뒤틀렸다는 지적은 이미 ‘후지모토 타츠키라는 열병’으로서 유행하고 있지 않던가. 이상할 정도로 닫힌 단편선들이지만, 그 완고함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이 닫힌 세계는 보호받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나유타>에서 주인공은 예언의 주인공인 동생을 감싼다. 동생은 실어증에 걸렸지만 사실은 언어가 다른 쪽에 가깝다. 마치 외계에서 온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의사소통은 이들 작품과 현실이 서로 언어가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를 따른다면 ‘예술’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수 없으며, 어쩌면 사람을 해칠 것도 같다. 그럼에도 ‘예술’은 인간의 편에 서서 현실을 이해해보려 노력해야 하고(<뒤뜰>), 현실은 언제나 역겹지만 그럼에도 찬가를 불러일으키기에 영화로 하여금 자신을 탐하려 들게 한다(<인어>). 무엇보다 영화는 단지 현실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성실할 수 있지만 반대로 그런 현실을 뛰어넘지는 못한다(<여동생>). 영화는 ‘정지’가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절대’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사사키 군>). <룩백>이 이들 만화와 함께 바라보아져야 하는 건 결국 이 만화가 순간을 추모하는 삶의 여정에 속해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