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머리 없는 신의 대관식

by 수차미
삭둑_숲속의참치.jpg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많은 점이 각색됐지만 딱 하나 차별화되는 게 있다. 괴물에 초재생 능력을 부여해 끝없는 불멸의 길로 인도했다는 점이다. 죽음에서 태어난 괴물은 정작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의 여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그가 읽었던 책들은 사유의 지평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영화 중반, 숲 속의 어느 한 가정에 숨어든 괴물은 장님 노인의 환대를 받아 여러 책을 읽는다. 그중에는 밀턴의 『실낙원』이 있는데, 책이 다루는 내용은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다. 원작이 창조물로서의 ‘아담’에 주목한다면 델 토로는 ‘낙원’에 주목한다. 삶에서는 오직 살아가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 이 안에서 죽음은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매독에 걸려 괴물의 몸에 자신을 이식해줄 것을 부탁했던 하인리히도, 어머니의 죽음에서 죽음을 피하는 법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은 빅터도, 모두가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와중 괴물만이 유일하게 죽음에서 자유롭다. 괴물은 이 죽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죽음 자체는 고통스럽거나 슬픈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다. 괴물의 몸은 여러 접합면을 담고 있고 얼굴에서는 생전 인물의 흉터가 가득하다. 이는 탄생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니 회복될 수도 없어서 앞으로도 그가 말끔한 얼굴 행색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괴물의 삶은 불완전함에 고정돼있고, 회복과 안정을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이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 ‘내쳐진’ 존재인 셈이다.


괴물은 빅터에게서 다이너마이트를 건네받고서, 폭탄이 터진 후에도 자신이 살아있다면 더는 당신을 쫓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폭발 이후에도 그는 묵묵히 깨어난다. 겉으로 드러난 몸의 상처보다 더한 건 마음의 상처다. 다른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입장인 그는 이 모든 이야기의 밖에 선다. 마치 영화가 끝나면 우리들 관객이 다시 현실에 돌아가듯, 한 이야기를 떠나보내는 건 독자인 그의 몫이다. 액자형태로 구성된 영화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크레딧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올라온다. “삶이 갈기갈기 찢기더라도 끝내 살아내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다.” 이 생존에는 단순히 몸과 마음의 지속만이 아니라 어떠한 의지의 표명도 포함되는 것 같다. 영화의 도입부에 북극항로를 두고서 선원과 갈등하던 선장은 빅터와 괴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생각을 바꾼다. 인간의 이성이 고개를 들던 19세기 중반은 온갖 형태의 낙관이 팽배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 뒤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괴물의 등장은 먼저 온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선장은 이 길의 끝에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깊은 패배가 있을 것임을 직감한다. 생명에 대한 정복이 이성의 승리로 여겨졌지만 오히려 죽음에서 도망칠 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이성적인 사고의 마비를 뜻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이성의 의미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이성이 말하는 진보의 의미를 오인했을 수 있다. 전방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미래’와 ‘낙관’을 서로 겹쳐보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허나 ‘이성’이라는 건 오히려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이자, 기약할 수 있는 내일을 잃어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도 이런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는 외계인 음모론에 빠진 인물이 화학기업의 CEO를 납치해 고문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납치당한 미셸은 테디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라고 조언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를 않는다. 양봉을 하는 그는 꿀벌들이 사라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고, 끝내 외계인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다. 이 음모론은 한 시대를 지명하기 전에 우리에게 내일이 있을지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성이 승리한 듯 보이지만, 그게 사실은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일 뿐이라면 무엇이 야만이고 무지인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특히 영화의 결말이 작중 내내 시뮬레이션 됐던 음모론의 결과를 직접 연산해내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일반적으로는 전반에 펼쳐진 이야기를 후반에서 짚고, 이를 뒤집는 게 반전 스릴러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고니아>를 비롯한 원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이 점은 철저한 공식으로 지켜진다. 음모론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케빈 인 더 우즈> 같은 클리셰 분쇄류의 장르는 사람들의 이성을 최대한 흩어놓으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그에 붙들렸던 현실도 덩달아 무너져버리고는 하는데 결국 현실을 말하는 작품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게 돼버린다는 단점이 생긴다. 영화 자체가 외부로 확장되지 못하고 내부에 연산자로만 격리된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영화를 이렇게 닫는 일은 이를 한 세계의 씨앗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부고니아>는 음모론을 다룬다는 점에서 결국 영화 안으로만 끝나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영화는 한 현실을 가둘 수는 있어도 한 현실을 대체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를 안전하게 해결하는 법으로는 코미디가 제격이다. <돈 룩 업> 같은 것도 그렇지만, 외계인 행성으로 보내든 우주적 존재가 지구를 다 부셔버리든 이 세계가 현실에 이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좋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는 편이 더 낫고, 이성적으로 풀기보다 기이함을 선보이는 게 더 편하다. 특히 이는 마무리 짓는 지점을 제시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도 동시에 지정한다는 뜻에서 위에서 말한 ‘격리’의 역할을 수행한다. 서투르더라도 그 결말의 방식이 극단적일수록 효과는 더 좋다. 모든 것은 찰나고, 당신은 평화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영화는 전혀 다른 형태의 기능성을 발휘하게 된다. 격리된 내부를 씨앗 삼아 또 다른 세계를 배태한다는 점이 그렇다. 여태까지의 삶이 죽음을 향하며 내일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면 영화도 그 안에 포함되기 마련이다. 이때 영화는 죽음의 대항마가 아니라 인지 영역에 더 가까워서 내일의 범주를 지정,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단순히 영화가 내외부로 통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이를 기억하는 방식은 내부를 관통해서일 테다. 그러나 육안으로 분간할 수 있는 형태의 ‘끝’을 제시하면 이곳에는 더는 뒤를 돌아보는 일 같은 건 필요 없어진다. ‘끝’을 관측했다면 반대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시작점과 끝을 하나로 엮고서 내일을 기약하는 게 가능하다.


다시 <프랑켄>으로 돌아가면 인접면이 보이는 괴물의 몸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의 삶이 갈기 찢긴 미래가 괴물의 몸을 구성하면 광휘에 찬 기억이 이들의 과거를 응시한다. 이 과정에서 삶은 금방이라도 찢겨나갈 감정을 구태여 끌어안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괴물은 빅터에게 자신이 실낙원에서 보았던 아담과 이브에 해당하는 동반자를 만들어달라고 하지만 빅터는 두 번이나 죄를 저지를 수 없다며 이를 거절한다. 빅터는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작품 내내 그는 이성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는 점이다. 그가 처음으로 생명창조의 꿈을 사람들 앞에 증언했을 때는 모두가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 물음 자체가 빅터에서 괴물에게로 다시 이관된다. 빅터는 괴물이 ‘빅터’라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며 자신이 이성을 지닌 존재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그러자 곁에 있던 엘리자베스는 괴물의 세계가 빅터 자신에게 갇혀있기 때문이라며 그를 바깥으로 내보낼 것을 제안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떠올리게 하는데, ‘관객’ 자신에 영화가 갇혀있으면 결국 한 가지 의미밖에는 도출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끝’을 마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영화는 유의미한 형태로 기억되지 않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뒤를 돌아보는 시점이 영화에 맞닿는 순간은 한 세계가 무한한 형태로 순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파멸에 이끄는 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지식의 저주다.


영화는 기억물질을 운반하는 밈과도 같아서 실체를 놓고 보면 그 안에는 아무런 것도 없다. 도리어 우리가 영화를 추억하는 건 그에 느낀 무언가를 ‘마치거나’, ‘끝내야 함’을 직감해서다. 즉 영화는 종말의 감각에 많은 면을 기대고 있고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무언가를 사고할 수 없게 한다. 돌이켜봐도 대부분의 영화는 그 자신이 허구임을 숨기지 않으며 우리 또한 어느 정도의 합리성만 있으면 이를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렇게 보면 <부고니아> 같은 작품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에 속한다. 다만, 영화가 삶을 이어가는 단계는 결말을 예측하는 일에서 그에 대한 부정으로,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내일을 기약하는 형태로 이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영화는 얼기설기 얽혀 부패한 몸을 끌어가는 언데드가 아니다. 그 또한 집으로 돌아가는 법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영화 안에서 끝을 직감하고, 이별을 말하는 작품들에 많은 애착이 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붕괴나 <에반게리온 다카포>에서 아버지와 신지가 서로 화해하는 순간이 그렇다. 특히 이들 영화는 현실의 시뮬레이션 우주로서, 자신이 관측한 미래를 세월의 여명이 아니라 세기의 순간으로 발명해낸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무언가를 기억하기보다 기억됨으로써 세계의 맹점을 담는 건 무엇보다 이 시대의 영화가 해내야 할 과업일 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혁명의 언어는 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