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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수돌 Mar 10. 2023

우연히 도와드린 할머님이 대학 선배일 확률

네, 66학번이시라고요? 세상에나

할머님과의 만남


회사가 쉬는 날이라 잠시 대본 미팅을 하고 공덕 공유 오피스로 향하던 길이었다. 6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노래를 들으며 앞만 보고 걷던 내게 갑자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외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국인 같았으나 한국어를 하나도 모른다면서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다. 


할 수 있다고 하니 본인이 한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가방을 들고 모셔다 드리고 있는데 소통이 불가하다고 대신 도움을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남성은 대학생 같아 보였는데 들고 있는 가방은 할머니들에게 인기 있는 스타일의 여행 가방이었다. 그 남성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한 할머님이 힘겹게 한보 앞서 나가고 계셨다. 


뜻밖의 지하철 여행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니 내가 도와드리겠다며 그 남자를 보내고 할머님께 다가가니 얼굴이 창백해 보이셨다. 할머님께 괜찮으시냐며 제가 부축하겠다고 하니 여자라서 편하신지 선뜻 내 팔을 잡았다. 


그렇게 할머님을 부축해 가며 간신히 6호선 약수역 개찰구까지 다다랐을 때 할머니는 감사하다며 본인이 오늘 너무 힘들었다고 하셨다. 아들이 안면도에서 펜션을 하는데, 잠시 도와주러 갔다가 올라오는 길이었다며 별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오랜 시간 지하철과 버스를 타다 보니 녹초가 된 것 같다고 하셨다. 


6호선을 타고 꽤 멀리 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분을 그대로 혼자 보내기에 마음이 내키지 않아 혹시 가족분들이 역으로 와주실 예정이냐고 여쭤봤다. 딸네 집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시며 나보고 학생은 갈길가도 된다고 배웅해주려 하셨다. 


31살에 학생이라는 말을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어릴 때 귀한 손녀라고 예뻐해 주시던 친할머니가 생각 나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사진으로만 보던 외할머니와 닮은 듯한 인자하면서도 왜소한 할머님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 갈길을 갈 수 없어 지하철이 올 때까지만 도와드리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할머님과 같이 지하철을 탔다. 


출처: 기분 좋을 때 쓰면 좋은 짤(https://url.kr/oucfes)


미션이 끝날 때까지


공덕으로 빨리 가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서는 할머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할머님은 내가 따라가는 것이 미안하셨는지 연신 여기서 그만 내려도 된다고 하셨다. 나도 사실 지금이라도 내릴까 싶었지만, 마음이 따로 놀아서일까 내릴 수가 없었다. 


할머님이 몸이 좀 편찮으시다고 노약자석에 앉아계신 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할머님을 앉치고선 내 미션이 끝났다고 사라져 버릴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면 기력이 부족할 수 있고, 그때 운이 나쁘면 정말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부모님을 통해, 또 친척 어르신분들을 보면서 충분히 깨달았기 때문에 할머님을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모셔다 드려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할머님을 따라 약수역에서 고려대까지 지하철 여행을 한 뒤 내렸는데, 할머님은 이제야 몸이 좀 한결 낫다면서 혼자 마을버스를 타러 가겠다고 하셨다. 아무래도 자녀분들이 바쁜데 걱정할까 봐 힘드신 걸 내색하지 않는 듯하셨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도와드려야겠다 싶어서 택시를 태워드리겠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셔서 마을버스를 태워다 드리려 깊이 개찰구 밖을 나갔다. 


사실 저는 학생이 아니고..


할머님이 착한 학생이라며 혹시 어디 학교를 다니냐고 물으셔서 31살이라고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다. 할머님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아, 할머님의 립서비스가 아니었구나.' 싶어 행복했다. 할머님이 혹시 결혼은 했냐며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실 것만 같은 바이브로 인적사항을 물어보시길래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결혼은 했다고 말씀드렸다. 

출처: 기분 좋을 때 쓰면 좋은 짤(https://url.kr/oucfes)


31살의 나이에 놀라고, 결혼했다는 말에 한번 더 놀란 할머님은 너무 내 인적사항만 물어본 것에 미안하셨는지 본인은 00여대를 나왔다고 하셨다.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데 나 또한 그 학교를 나왔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는 맞지만 이 넓은 대한민국에서 내가 우연히 도와드린 할머님이 학교 선배일 확률은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낮음에는 분명했다. 


게다가 66학번이라니. 66학번이면 20살 때 대학에 입학하셨다고 하면 47년생 이 실 텐데 그 나이에 대학을 나오신 분을 가까이에서 뵙는 것은 처음이라 놀랐다. 게다가 당시 여성들이 많이 가던 가정학과 같은 학과가 아닌 학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입학하던 학과라는 사실에 이분이 살아온 세월은 어떤 세월이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호칭을 할머님에서 선배님으로 바꾸고는 마을 버스정류장까지 그분을 데려다 드리며 당시 학교 생활에 대해 여쭤봤다. 할머님은 그 옛날 60년대 학교 이야기와 현재도 여전히 일 년에 몇 번 학교를 가는데 갈 때마다 변한 모습에 깜짝 놀란다고 하셨는데, 너무나 격하게 공감이 되어 마치 선배 언니와 수다를 떠는 것만 같았다. 


마을버스를 타고나서 할머님은 끝으로 내게 정말 오늘 도와준 은혜는 잊지 않겠다며 언제 어디서든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바란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출처: Unsplash의 Nickolas Nikolic


특별한 에피소드가 모여 만드는 특별한 인생을 위해


보통의 나이 드신 분들은 본인보다 어리면 반말을 하기 쉬운데, 후배인 것을 알고 나서도 끝까지 내게 존칭과 존댓말을 하셨던 할머님 덕분에 나이가 든다면 이분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도운 나 자신에게 칭찬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건 아니었다. 그저 우연히 도와드린 할머님이 대학 선배였던 것처럼, 상사의 어머님일 수도 있고, 또 친구의 할머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집 근처 건물주님이 실수도 있고 정말 모르는 분일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인연이다라는 생각으로 도와드린다면 인생에 이처럼 특별한 에피소드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에피소드가 모여서 인생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든다면 조금만 시간을 할애해서 내가 피해 입지 않을 정도로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 글을 썼다. 



P.S) 오늘 도와드린 할머님이 만수무강하시면 좋겠고, 이 글을 또 우연히라도 할머님의 아드님이 보신다면 어머님이 내색하지 않아도 힘들어하시는 것을 부디 알아주시면 좋겠고. 이 글을 보는 독자님들의 인생에도 이처럼 특별한 에피소드가 가득 쌓이길 바랍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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