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새알심
이제는 내가 해줄게. 엄마
엄마는 종종 내게 돌아가신 할머니가 해주신 팥죽이 먹고 싶다고 했다. 새알심이 잔뜩 들어간. 할머니의 레시피를 알고 있기에 진작에 만들어 먹을 수도 있는데 엄마는 말씀만 하실 뿐 팥죽을 끓인 적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방에 있는 내게 엄마는
“찰흙 놀이 할래?”라고 물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며. 이 나이에 무슨 찰흙 놀이인가 싶었다. 알고 보니 새알심을 만들어 달라는 얘기였다. 팥죽은 본인이 할 테니 새알심은 네가 만들어라. 아니 이건 뭐 한석봉 어머니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거실로 나가보니 찹쌀가루 1kg 와 그에 걸맞은 스테인리스 볼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 오늘 엄마가 날을 잡았구나’ 하고 자리에 앉아서 볼에 찹쌀가루를 넣고 체온 정도의 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익반죽을 시작했다. 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반죽의 되기를 맞추고 최종적으로 엄마의 합격 사인을 받았다.
눈앞에 놓인 반죽을 보니 만들다가 이번에도 허리가 박살 나는 자세로 가겠구나 싶었다. 한입 크기로 떼어내서 손바닥이 아닌 손가락 위에 올려두고 동글동글하게 만든 후에 쟁반 위에 나란히 줄을 세웠다. 만들어둔 새알심이 마르지 않도록 비닐을 덮어주고 반죽이 동이 날 때까지 기계처럼 반복했다.
"으아 끝났어. 아이고 허리야”
기계는 작동을 멈췄고. 엄마는 새알심을 하나하나 용기에 옮겨 담았다. 오늘 팥죽을 만들 거 아니냐는 질문에 엄마는 딸이 힘들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바로 해 먹냐며 냉동실에 넣어둔다고 하셨다. 다 먹으면 또 만들면 되고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엄만 그냥 할머니를 오래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까? 어린 날을 추억하면서 말이다. 할머니가 새알심을 만들어 냉동실에 두고 때마다 꺼내서 요리해주던 그 모습 말이다. 엄마도 할머니를 닮아가는 듯했다.
얼마 뒤 엄마는 매생이 소고기국을 끓이면서 자연스럽게 냉동실에서 무언가를 꺼내 팔팔 끓고 있는 국에 넣었다. ‘뭐지??’ 싶었는데 얼마 전 만들어두었던 새알심이었다. 새알심을 듬뿍 넣은 매생이 소고기국이라? 조금 생소했지만, 엄마를 믿어보기로 했다.
새알심과 함께 한술을 떠서 입에 넣었다.
“아 뜨거!!!!!“ 새알심 자제도 뜨거웠지만, 매생이에 관한 속설이 떠올랐다. 결혼하기 전 사위에게 매생이 국을 주면서 성격이 급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본다는 말. 요즘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이런 맛인가? 반으로 쪼개어 후후 불어 넣어보기도 하고 하나를 통째로 넣어보기도 하면서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뜨거워 용처럼 입김을 불기도 했다. 쫄깃쫄깃하고 특별한 맛을 내는 건 아니었지만 매생이와 잘 어울리는 게 신기했다.
엄마. 맛있어? 라고 물으니 응.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서 깊이가 느껴졌다. 팥을 불려놓아야겠다. 내가 하지 않으면 왠지 영영 새알심이 들어간 팥죽을 못 먹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툭툭 팥죽이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해야겠다.
아끼다가 뭐 된다는 말이 있듯이. 아끼지 말고 먹자며. 같이 추억하자고 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