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한국 첫 영국오리지널팀 공연 레미제라블의 한국인 아역배우 에포닌
커다란 삐에로 풍선같은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무서운 분장을 하고 나에게 몸을 기울이며 지나간다. 내 머리를 툭툭 만지고 지나가는데, 힘이 얼마나 센지 안그래도 작은 키가 더 작아지는것 같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리번 거리는데 큰 영국 아저씨들이 뭐라고 말을 건다. 너무 무섭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데, 헤드폰을 쓴 아저씨가 내 손을 훽 잡아채고 나를 커튼 뒤로 숨긴다.
아저씨는 다행히 우리사촌오빠같이 생겼다. 영국사람인거같지는 않다. 아저씨가 내 두 팔을 꼭 잡고는 입을 크게 벌려 발음하며 조용히 속삭인다.
“자 꼬마야,아저씨가 싸인을 주면, 저기 테이블위에 인형보이지? 저기에 가서 인형을 만지고 놀고 있어. 그러면 저기있는 뚱뚱한 아줌마가 ‘웨포니!’하고 부를거야 그러면 아줌마한테 가. 그리고 나서 저기서있는 언니를 째려보고,한번, 두번, 세번 밀고 나오면 되는거야. 몇번 밀라구?”
나는 손가락 세개를 들어올리고 머릿속으로 순서를 기억한다. 순서를 두세어번 되뇌세기도 전에 아저씨는 또 내 팔을 꼭 잡기시작했다. 아픈데 왜 이리 꽉잡는건지. 다른 손으로 아저씨의 손을 뿌리치려고 하는데 아저씨가 “지금이야!”하면서 나를 커튼 밖으로 밀친다.
빛이 밝다. 잠깐 앞에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 같더니 눈을 깜박깜박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모인 것 마냥 엄청난 수의 머리들이 보인다. 1번. 얼른 테이블을 찾아야지,찾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인형을 집었다. 인형이 엄청 못생겼다. 그래도 좋은 척 인형을 아래위로 들면서 놀고있는데, 아줌마가 내 이름을 부르긴 불렀나?사실 지금 너무 덥고 떨려서 소리는 하나도 안들린다.곁눈질로 아줌마를 보니 아줌마가 내게 몸을 기울여 뭐라고 말을하고 있다. 정확히 웨포니라고는 안부르는데 비슷하게 이쁘니! 머.. 이렇게 부르고 있었던거같다. 영어라서 사실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부르길래 일단은 달려갔는데 아줌마도 놀랬는지 나를 높이 안고 세바퀴나 돈다. 아이고 어지러. 그 언니 어딧더라? 언니를 밀러 가야하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은 척하며 드디어 한번, 두번, 세번.
불이 꺼졌다. 또 누군가 내 팔을 꼭 잡고 커튼뒤로 휙 데려간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끌려가는데 천사소리같이 예쁜 피아노소리가 들린다. 커튼뒤에서 빼꼼보는데 아까 내가 밀고왔던 그 언니가 노래를 부른다. 저 노래,나도 아는 노랜데…
몇달 전 영국오리지널팀의 내한공연에서 주인공여자아이를 뽑는다며 저 노래로 오디션을 본적이 있었다. 왠지 눈물을 흘리면 더 잘보일것같아 감정을 잡다가 순서를 놓쳤는데도 나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하지만 다른 방송스케쥴때문에 3개월을 비울 수가 없어서 아주작은 역이라도 하겠냐고 해서 얻은 역이 웨포니였다.저 언니는 영국에 오리지널팀과 3개월을 훈련하고 왔다지? 영어도 잘하겠구나.그 언니가 부른 노래는 Castle on a cloud. 나처럼 삑사리도 안나고 참 천사같이 잘한다. 그런데 부러움 때문이었는지 나는 무대뒤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1996년 영국오리지널팀의 한국 첫 내한공연,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서 였는지 아역배우들과 몇몇의 앙상블은 국내캐스팅을 했고 나는 아주 운좋게 역할을 따냈다. 당시 뽀뽀뽀에 출연하고 있던 터라 더블스케쥴을 소화할 수 없었지만, 제작팀은 대사한마디없는 에포닌역이라도 하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나는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기회를 얻었다. 7살때 이연경씨가 하는 뮤지컬 피터팬을 본 뒤 초등학교 내내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던 나는 그렇게 남들보다 빨리 꿈을 이루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이렇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인 줄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