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주 차: 남은 휴가

이번 주, 나는 올해 마지막 남은 휴가를 소진했다.

by 수혁


햇살 좋은 아침이었다. 창문 블라인드 틈 사이로 거부할 수 없는 뜨거움이 스며들었다. 결국 잠에서 깨서 침대를 짚고 일어나 보일러 온도를 조금 높였다. 미리 높이지 않으면 몸을 씻을 때 뜨거운 물이 바로 나오지 않아서다. 그리고는 오늘을 위해 미리 세탁해 둔 옷을 챙겨 입었다. 감사하게도 옷이 뽀송뽀송했다.


39세의 마지막 달, 나는 지금의 원룸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여과 없는 태양 빛이, 미지근한 화장실 물이, 딱딱한 바닥이, 마르지 않는 빨래가. 그나마 지난주 구입한 저상형 침대와 소형 빨래 건조기 덕분에 삶이 조금은 윤택해졌음을 느꼈다. 너무 편리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체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나의 올해 마지막 연차 소진 일이었다. 가방에 서류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5호선을 타고 얼마간 가다가 동인천행 1호선으로 환승을 했다. 4년 간 출퇴근을 위해 오가던 노선이었지만, 근 한 달 만에 탔다. 출근 시간을 비껴간 평일의 1호선은 너무나도 한적했다. 이제 어떠한 주기적인 목적이 생기지 않는 이상 인천을 갈 일이 있을까 싶은 생각에 느낌이 이상했다. 거의 텅 빈 공간 속에서 근 4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행복했고 따뜻한 감정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찰나와 같은 1시간을 지나 목적지에 도달했고 습관처럼 전철을 내려 이동했다. 나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방해한 건 놀랍게도 개찰구였다.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는 음성이 울려 퍼졌고, 이내 ‘기후동행카드’로 여기까지 왔음을 깨달았다. 한 달 사이 나의 일상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앉을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했다. 먼저 도착해서 대기표를 끊고 조금 기다리자 만나기로 한 상대방이 다가왔다.


“우리 번호는 72번이야.”

"와, 사람 엄청 많네."


상대방은 환하게 웃으며 붐비는 공간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1분마다 대기열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내 빈자리가 나서 함께 앉았다. 그때 나는 주머니에서 원형의 금속 쪼가리를 건네면서 생각해 둔 이야기를 꺼냈다.


“이거 도저히 못 팔겠어서. 아마도 세트로 팔면 더 잘 팔릴 거야.”

“난 이미 팔았는데 이걸 왜 가지고 있어.”


상대방은 가벼운 핀잔과 함께 어디에서 팔면 좋은지 신나게 꿀팁을 공유해 줬다. 나는 황급히 조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넸다. 루돌프 인형과 어린이 화장품 세트였다.


“조카들한테 편지도 썼는데 읽어보고 아닌 거 같으면 버려도 돼.”

“분명 가져올 줄 알았어. 잘 전달할게. 고마워.”


어떠한 상황에서도 배려와 감사를 하는 모습, 생각해 보면 상대방의 이런 모습이 참 좋았었다. 서로 가만히 지금의 장소에서 나무문이 열고 닫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열리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좀 오래 걸리네.”

“누군가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걸까?”


상대방의 상상에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보자, 상대방은 넌지시 물었다.


“안 바뀔 거지?”


나는 무언가 대답하기가 어려워져 아까의 질문에 이어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부모님들, 각자의 조카들, 강아지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 우리의 관계는 달라졌으나, 서로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 듣는 일상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윽고 장내에서 “70번 들어오세요.”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내 우리들의 시간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쉽지 않아야 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고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 결정이 바뀌지는 않았기에. 서로를 바라보다가 준비한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를 제출하고 함께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렇게 올해 마지막 연차 소진 일. 내 결혼생활은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30대를 되돌아보았다. 30대 중반까지는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30대 후반부터는 결혼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을 쳤다. 39살의 끝자락에서 되돌아보니, 가장 치열했던 30대의 절반을 뭉텅 잘려나갔다는 기분도 들었다. 다만,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온전히 내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이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얻는 것도 있었다. 그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고 선택한 우리의 미래였다.


앞으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이제 출퇴근 시간이 하루 3시간에서 30분으로 줄었고, 개인 시간이 하루 30분에서 3시간으로 늘어났다. 내년에는 좀 더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회사 생활을 열심히 해보기로 다짐했다. 하루하루 소멸해 가는 일상의 기억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넘어지기도 하고 찬란하지도 않은 일상의 기억들을 기록하기에 충분한 시간들이다. 여러모로 새로운 시작을 하기엔 좋을 시기이기도 하다.


다음 주면 40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