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견 : 하지메
오늘 소개할 동화는 일본 작가 오츠 이치가 쓴 작품 평면견의 단편 중에 하나인
하지메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이 작품이 손에 닿은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마치 작품 속의 하지메가 그런 것처럼.
우연히 서가 정리를 하다가 오래 전에 좋아해서 수집했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유독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고, 그게 바로 하지메다.
작품의 내용은 상상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소년 코헤이와 키조노는 우연히 학교에서 돌보던 병아리가 죽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걸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소녀 하지메가 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자신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존재였지만, 그 변명은 먹혔고, 그러자 아이들은 그 상상의 존재에
점점 더 설정을 덧붙이고 이야기를 만들어서 마치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꾸미게 된다.
그래서 교실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저지르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악동 소녀의 소문이 돌게 되고
두 사람은 그런 소문을 퍼트리면서 점차 그 소녀가 실제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성장하면서 상상 친구인 하지메도 같이 성장해나가고
때로는 악동처럼 굴기도 하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을 돕기도 하는 상상 속의 히로인처럼 커간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점점 현실적인 상황은 늘어나고 그 과정에서
하지메의 존재도 점점 희미해지면서 언제부터인가 느낄 수 없게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네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하지메는 영원히 그들에게서 사라진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서 고향에서 다시 만난 코헤이와 키조노.
두 사람은 어쩌면 하지메가 그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교통사고에서 하지메가 자신을 감싸준 것을 기억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가 실제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한때 일본의 장르 작품에 미쳐있던 적이 있었다. 묘하게 닫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터져나오는 상상력을 주체못하는 듯한 괴리감에 취해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작가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오츠이치였다.
상당히 묘한 작가 중에 한명이다. 잔혹한 내용에서는 이게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올 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로 잔혹해지면서,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동하게 한다. 그런 아이러니함마저 느껴지는 작가의 작풍을 사랑했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는 하지메는 세간에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내가 읽어본 오츠 이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아련하고 정적이면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에 누구나 상상 친구 하나 정도는 만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춘기를 접어들기 전, 공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오로지 나만의 친구가 되어주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동경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테니깐.
그리고 하지메는 그런 상상친구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희미해졌어도, 거기서 묘사되는 블루베리 껌의 향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야기 속에서 하지메는 살아 숨쉬고 같이 놀고 어울려주는 이상의 존재였다.
읽는 독자인 나 조차도 그런 환상에 빠질 정도인데, 작중에 소년들에게는 얼마나 이상적이었을까?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런 이상의 존재가 어느 순간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도 담담히 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코 허상의 존재가 아닌, 그들의 옆에 있었고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다 읽고 나서 작가에게 원망마저 들었다.
아니... 조금만 더 행복하게 해줄수는 없었던 건가요? 아련함도 좋지만 이런 건 좀 슬프잖아요.
그리고 이번에 다시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조금 씁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예전에 내가 코헤이와 키조노처럼 매혹되었던 그 아이가 여전히 거기 있었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잘지냈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답해주고 싶었다. 그래, 잘 지냈어. 그리고 동화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
언젠가 네 얘기와 같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그녀가 틀림없이 잘할 수 있으니 힘내라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예정에 없이 서가에서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리뷰하게 되었다.
쌀쌀해지는 가을날에 한번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부모님들에게도. 혹시 그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자신과 같이 놀았던 그 상상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고 인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깐.
부디 그런 반가운 재회가 되기를 기원하며 여운과 함께 리뷰를 마친다.
#평면견 #오츠이치 #하지메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