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

2019.01.29

by 종이소리

"황금빛으로 장식된 저 영광스러운 거대한 궁륭"이라던 햄릿의 말을 몰랐다면 나는 이 영광을 그냥 놓치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비좁고 허약한 언어능력에 발만 동동이다 눈을 감았을지도 모른다.


매일 저녁 수평선을 물들이는 영광을 마주하며 산다는 것은, 나의 빈약한 언어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고결한 비극, 아니 참 고약한 사치로다. 노을 바닷가에서 산다는 것은

2019년 1월29일의 사치.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나의 2019년은 그렇게 "사치로운" 시작이었다.


가끔은 푸른 바다의 파동을, 붉은 노을의 채도를, 그리고 내 안의 일렁이는 감정을 온전히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때가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갈망이야말로 나를 베틀 앞에 앉게 하고, 펜을 들게 만드는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 참 다정한 스승이다. 2019년, 통영 바다로 지던 저 노을.


칸트는 '인간의 상상력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경이로움'을 '숭고'라고 했다.


숭고한 노을 앞에서 느끼는 그 속수무책의 마음은, 자연의 거대함 앞에 선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깊은 경외심 그 자체였다. 수평선 너머로 쏟아지는 황금빛은 바다뿐만 아니라 내 베틀 위의 씨실과 날실까지도 영롱하게 물들이며 아주 '태연자약'하게 밤을 켜 놓고 떠났다. 나는 흥분과 감동의 파도를 타게 해 놓고.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내가 대응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한 구절이 전부였다.


"황금의 빛으로 장식된 저 영광스러운 거대한 궁륭(Canopy)."


언어는 단순히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감각하는 그릇이다. 햄릿의 고뇌 어린 문장이 내 눈앞의 현실과 결합하는 순간, 통영의 평범한 바닷가는 인류의 고전이 숨 쉬는 신화적 공간이 된 듯 했다. 내 베틀이 주연인 신화. 그날 바다를 마주하며 베를 짜지 않았다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장면이었으니까.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우리가 풍경을 보고도 감탄하지 못하거나, 고통을 느끼면서도 위로받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폭이 너무나 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섬유공예가로서 실을 잣는 행위도 결국 언어를 만드는 일과 닮아 있다. 한 가닥 한 가닥 엮어가는 이 행위는, 세상을 향해 내뱉는 무언의 문장이며, 완성된 직물은 내가 이해한 또 하나의 꿈에 대한 기록이다.


"고약한 사치"

노을 바닷가에 산다는 것은 분명 "고약한 사치"다. 끊임없이 나를 매혹하니까, 이 아름다움을 작품을 또 다른 이야기로 구현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니까.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언어로 생의 지도를 그리는 여행자이다. 누군가는 비관의 안개 속을 헤매며 길을 내고, 누군가는 희망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걷으며 저마다의 존엄한 삶을 완성해 나가는 중이다. 햄릿의 박동이 나에게 일몰의 영광을 선사했듯, 나의 마음과 작품이 누군가에게 비좁은 현실을 견디게 할, 한 가닥 희망의 실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나이를 숭고하게 추억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