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0대의 끝자락. 잘 다니던 회사에 휴직계를 던지고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혼자 800km 산티아고순례길을 걸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행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특목고, 명문대, 대기업...
그동안 '좋아 보이는' 삶을 살기 위해 앞만 보며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인지에 대한 회의와 이유 모를 공허함이 찾아왔죠.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이 맞나. 이게 제대로 된 삶인가?
뒤늦은 사춘기와 혼자만의 방황을 거듭하고 또 거듭하다가 훌쩍 떠난 여행.
대단한 모험과 에피소드가 넘치는 이야기는 아닐 수 있지만
남들과의 비교에 지치고 조바심이 가득했던,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 방황하던 제가
여행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성장 해나갔는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조그마한 응원과 위안을 드리고 싶어
시간은 조금 지났지만 용기를 내어 경험을 공유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19년 여행 당시 작성한 글을 다듬어 발행하는 것으로, 글의 시점은 2019년입니다.
2018년 12월의 어느 날, 회의실.
몇 달간 마음속 깊이 수백 번도 넘게 고민하던 이야기를 드디어 꺼내고 말았다.
"전무님, 저 휴직하겠습니다."
잠시간의 정적.
'요놈 봐라?' 하는 눈빛으로 전무님은 물었다. "왜?"
"세계여행을 가려합니다. 시작으로 산티아고순례길을 걸을 생각입니다."
그러자 처음과 똑같은 질문이 사뭇 다른 말투로 되돌아왔다.
"왜...?"
그러게나 말이다. 왜?
누군가는 돈 줘도 안 간단겠다는 고생길을,
잘 다니던 회사를 쉬어가면서까지
덩치도 쪼꼬만 젊은 처자가 왜 혼자 걷겠다고 한 걸까?
사실 언제부터 산티아고순례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한 것인지, 무슨 계기로 이 길을 결심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800km를 혼자 걷는 고행의 길인데, 이 길을 걷는다고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 길을 걷고 싶은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한 번 걸어보고 싶다. 해보고 싶다. 그게 이유다.
이걸 완주한다고 무언가 드라마틱하게 현실이 달라진다거나 변화가 생기는지는 모르겠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가 없더라도 걷고 싶다. 그냥, 해보고 싶으니까.
생각해 보면 살면서 지금까지 '그냥, 하고 싶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어떤 일을 했을 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익한' 일들에만, 분명한 목적이 있는 일들에만 시간과 공을 들이며 살아왔다. 나머지 일들은 시간 낭비니까.
그러다 보니 특목고, 국내 최고 명문대, 국내 최고 대기업... '남들이 말하는' 좋은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사실 행복하기도 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고, 같이 일하는 회사 동료분들도 좋다. 돈도 넉넉하진 않지만 대한민국 평균 대비는 나쁘지 않게 버는 편이고, 여행도 자주 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으러 다녔다.
근데 자꾸만 가슴속 한편에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뭘까?
회사 업무에 만족을 못해서일까. 재밌는 취미생활이 없어서일까. 결혼을 안 해서일까. 그냥 인생 노잼 시기인 걸까.
내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싶어 계속 무언가를 채우려고 노력해 봤다. 1년 넘게 주말에 영어학원도 다니고, 적금도 들어보고, 책도 읽고, 운동도 해보고.
하지만 아무리 그것들을 반복해도 내 안의 공허함과 갈증은 채워지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글귀를 하나 마주하게 되었으니...
"Insanity i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but expecting different results"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며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아, 변화를 꿈꾼다면 그동안의 나와는 다른 나처럼 살아봐야겠구나!
실타래가 엉키듯 꽉 막혀있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며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또다시 내 안의 질문
'그동안의 나는 뭐고?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은 뭔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는 아무것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 나는 그동안 계속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주변에서 필요하다고 하는 것들만 채우며 살아왔구나.
이게 '그동안의 나'구나.
그래서 다르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 해야 하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해보자. 이유가 없어도 좋아
- 정해진대로, 계획한 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해보자
- 편한 사람, 맨날 만나는 사람 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자
- 채우려 하지 말고 비우려 해 보자
이런 계기로 나는 젊다는 것을 핑계 삼아, 특별한 목적이 없더라도, 결과가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라도 '해보고 싶은 것'을 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과감히 회사를 쉬기로 했고,
그저 해보고 싶었던 산티아고순례길을 향한 여정에 올랐다.
산티아고순례길로 향하는 비행기 안.
막상 휴직을 저지르고,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니 불안감이 나를 가득 채웠다.
'그냥 돈이나 벌 걸. 괜히 휴직했나? 돌아가면 회사에 자리 없어지는 것 아닐까? 남들은 지금도 열심히 커리어 쌓고 착실히 돈 모아서 집도 사고 할 텐데 나만 뒤처지는 것 아닐까? 우리 가족들은 지금도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나만 좋자고 이렇게 혼자 여행 다녀도 되는 걸까?'
그러다가 혼자 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계속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면 계속 똑같은 불만을 가진채 평생 살아갈 거야. 100살까지 산다면 1년은 1%밖에 안 되는 시간이야'
다 괜찮을 거야. 아니, 괜찮지 않아도 좋아.
그 길에 무엇이 마주하더라도 오롯이 내가 받아들일 과정일 거야.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그렇게 800km 산티아고순례길의 막이 올랐다.
[Tip] 산티아고 순례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떠나는 순례길. 여러가지 루트가 있으나 프랑스의 '생장 피에 드 포트'에서 출발하여 약 800km를 걷는 프랑스 길이 가장 유명하다. 과거에는 종교적인 성지순례가 목적이었으나 최근에는 종교적 목적없이 수양 등을 위해서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아주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