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진의 패션잉글리쉬
tvN 드라마 '태풍상사'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무너진 무역회사를 맡게 된 청년 사장 강태풍(이준호 분)의 생존과 성장기를 그린다. 90년대 감성과 위기 서사를 현실적인 톤으로 담아내며, 당시 사회·경제의 긴장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삐삐, 시티폰, 플로피디스크, 다이얼 전화기, 구식 팩스기, 모뎀 컴퓨터 등 철저한 레트로 세트 재현으로 90년대의 배경과 감성 고증이 향수를 자극한다는 평을 받는다. AI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와 IMF를 겪은 부모 세대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끌며, 넷플릭스 한국 TOP 1, 글로벌 비영어권 TOP 10에 진입했고 시청률 또한 상승 중이다.
배우 이준호가 tvN 토일드라마 '태풍상사'에서 열연하고 있다. [사진=O3 Collective]
대사 속 어휘들은 '인턴'보다 '견습사원' '외상대금' '결재라인' '팩스로 문서 송부' 등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들이다. "외상 결제는 월말로요" "오늘은 팩스가 바빠서요"같은 90년대식 비즈니스 대사들은 이메일이 없던 시절, 팩스가 업무의 핵심이던 시대를 보여준다. 팩스는 한 건씩만 전송할 수 있었기에 '팩스가 바쁘다'는 표현이 실제로 통용됐다. 또한 '외상 결제는 월말로'라는 말은 단순한 결제일 약속이 아니라, '돈보다 신뢰가 먼저'였던 시대의 거래 방식을 상징한다.
태풍상사의 복고 패션은 1997년 한국 사회의 체면, 신뢰, 생존의 미학을 품고 있다. 사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나팔바지는 판탈롱, 벨보텀(bell-bottom) 등으로 명칭이 다양하다. 사실 판탈롱(pantalon)은 프랑스어로 '긴바지'를 뜻한다. 16세기 이탈리아 희극 배우 판탈로네(Pantalone)가 무대에서 입기 시작한 데서 유래해, 19세기 남성용 바지가 일반화되며 보통명사가 되었다가, 여성에게는 스커트 안에 입는 속바지 형태의 판탈렛(pantalettes)으로 변주되었다. 이후 판탈롱은 시대별로 디자인이 변하며 하단이 넓어진 플레어 실루엣으로 발전했고, 오늘날에는 플레어 팬츠(flare pants), 와이드 레그 팬츠(wide-leg pants)가 가장 보편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배우 김민하가 tvN 토일드라마 '태풍상사'에서 열연하고 있다. [사진=tvN]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가 아니라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라고" 외치는 태풍의 광택 셔츠, 목걸이, 반짝 구두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폼을 잃지 않으려는 자존감을 드러낸다. 그의 패션은 지금 봐도 낯설지 않아, '패션은 돌고 돈다'는 말을 증명한다.
오미선(김민하 분)의 스타일은 복고와 실용성을 겸한 '90년대식 미니멀 꾸안꾸'다. 하이웨이스트 스커트(high-waisted skirt)에 플로럴 블라우스(floral blouse)를 매치해 단정하면서도 생기 있는 스타일을 완성했다. '신용은 잃어도 체면은 지킨다'는 메시지를 전하듯, 큰 패턴의 넥타이(large-patterned tie), 버클이 큰 벨트(oversized buckle belt), 화려한 금장 시계(flashy gold watch)가 자주 등장한다. 복고는 단순히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불확실한 시대에 대한 위로'다. 태풍상사의 복고 패션이 웃기면서도 따뜻한 이유는, 그 시절의 어설픔과 과함 속에서도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레트로 패션은 다시 '힙하다(hip)'고 여겨지고, 랄프 로렌(Ralph Lauren)의 꽈배기 스웨터(cable knit sweater), 닥터마틴(Dr. Martens)의 워커 등은 여전히 핫한 아이템으로 사랑받고 있다.
요즘 세대들은 '드립(drip)'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본래 '방울, 떨어짐'을 뜻하지만, 힙합에서는 '스타일이 흘러넘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스타일 좋다" "옷빨 죽인다"에 가까운 칭찬이다. 미국 래퍼 릴 베이비(Lil Baby)와 거나(Gunna)의 2018년 히트곡 'Drip Too Hard'에서 'Check out my drip'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drip'은 패션 센스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다. "You’ve got the drip"은 '너 옷 진짜 멋지다'라는 뜻이다.
배우 이준호가 tvN 드라마 '태풍상사'에서 열연하고 있다. [사진=tvN]
요즘 세대들은 '드립(drip)'이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본래 '방울, 떨어짐'을 뜻하지만, 힙합에서는 '스타일이 흘러넘친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스타일 좋다" "옷빨 죽인다"에 가까운 칭찬이다. 미국 래퍼 릴 베이비(Lil Baby)와 거나(Gunna)의 2018년 히트곡 'Drip Too Hard'에서 'Check out my drip'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drip'은 패션 센스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자리 잡았다. "You’ve got the drip"은 '너 옷 진짜 멋지다'라는 뜻이다.
드라마 태풍상사 속 반짝이는 셔츠와 넓은 넥타이는 '자신감을 걸칠 수 있다면 세상도 버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1980년대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탐욕에서 탄생한 파워수트(Power Suit)는 넓은 어깨 패드(shoulder pad)와 고급 울(wool)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를 맞은 한국에서는 저렴한 폴리에스터(polyester)로 만든, 광택이 도는 '기도의 옷'으로 변주되었다. 다림질된 카라 하나가 '아직 버티고 있다'는 신호였고, "팩스는 늦어도 넥타이는 늦지 않는다"는 말은 그 시대의 존엄을 상징했다.
2025년의 시청자들이 태풍상사에서 위로를 받는 이유는, throwback이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그 시절 옷에 스며 있던 진심에 대한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드립(drip)'이 스트리트 감성과 스니커즈에서 나온다면, 90년대 시절의 드립은 땀과 두려움에서 흘렀다. 그 시절을 살아낸 이들의 반짝이는 셔츠 속 아날로그한 심장을 통해 많은 시청자들이 단순한 추억이 아닌, 자신이 버텨낸 시간의 온도를 느낀다. 진짜 drip이란, 멋이 아니라 버텨낸 시간에서 흘러나오는 품격이라는 것!
◇ 조수진 소장은 베스트셀러 '패션 X English'의 저자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영어교육 전문가 중 한 명이다. 특히 패션과 영어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로 영어 교육계에 적지 않은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UPENN) 교육학 석사와 스톡홀름 경제대학교(SSE) MBA 출신으로 (주)일미푸드의 대표이사와 '조수진영어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