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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Feb 08. 2018

어디에나 최악의 여행자는 있다

이스탄불 공항 국제미아 탈출기

여행자는 시스템과 시스템사이를

이동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국가, 항공사와 항공사,

이 공항에서 저 공항까지 잘 짜인 시스템의 연계 속에서만 우리는 여행을 잘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날, 그 날따라 잘 맞아 굴러가던 태엽사이 균열이 생길때, 여행자는 하릴없이 그 어두운 틈새로 빠지게 된다.



그 날 가장 운나쁜 여행자에 대하여


직장인 주제에 단전까지 끌어모은 연차의 힘으로 3주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다들 후기를 묻지만 사실 이번 여행 하이라이트는 귀국 길 이스탄불 공항에서 애처럼 엉엉 운 일이다. 주위 터키항공 직원들이 수군대는데도 군중 속 찬 바닥에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한 김00 양. 두시간도 안되는 환승시간동안 온갖 무시와 무관심 속에 환승데스크에서 어느새 이스탄불 길거리로 내몰렸다. 지금 생각해도 연유 모를 혼란과 혼돈의 한시간이다.


사건은 런던-인천 귀국길에 발생했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환승하다 문제가 생겼다. 앞서 탄 비행기가 10분 연착했는데 그걸 뒷비행기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 10분이 ‘미션:백투더홈’ 24시간으로 바뀌고 말았다. 10분 사이에 뒷 비행기가 날 두고 떠나버린 것. 피곤에 찌든 환승데스크 직원은 너 뒷 비행기가꽉 찼나본대? 라고 둘러댔다. 뭐? 순간 눈 앞으로 항공사 직원 멱살을 흔드는 내가 스쳤다. 그러나 지금 이스탄불 공항엔 따질 항공사 직원이 한명도 없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머릿 속에 분노 찬 물음표가 불법 팝업창처럼 사납게 떠오른다.

공항은 줄서기의 연속이다

지금껏 여행에선 운이 제법 좋아서, 도움을 요청하면 미소로 화답하는 사람들로 내 여행을 꾸몄다. 세상에, 그런데 지금 여기, 이스탄불 공항에선 누구도 내가 여기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관심이 없다. 공항 데스크 직원들은 길 잃은 여행자를 대놓고 귀찮아 했다. 내 핸드폰 배터리는 20%, 추운 날씨의 아이폰, 로밍도 안되는 상태인데 이스탄불 공항엔 와이파이가 없다고 했다. 지갑은 맡긴 배낭안에, 어깨와 손에는 면세점에서 산 귀국선물이 한가득, 공항 안은 도떼기 시장만큼 바글거렸고, 말을 걸기위해 어딜가도 한참 줄서야 했다. 머리가 아파올때쯤 겨우 찾아 도움을 요청한 인포데스크 직원은 내게 몇개의 번호를 툭 던졌는데, 전화를 부탁하자 ‘핸드폰이 없으면 핸드폰을 새로 사라’ 며 말을 끊었다. 으아.


단호한 인포데스크 직원을 뒤로하고 걷는데 '어디에나 최악의 여행자는 있다' 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그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다림으로 모두가 조금은 상기됐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제갈길을 찾느라 일제히 분주한 공항 한복판. 나만 홀로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심해의 말미잘도 나보다 무기력하지 않을 거야. 두시간 동안 나의 SOS신호에 감응않는 수십명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오랜만에 배낭 여행자란 지위가 얼마나 사회적 약자인지 체감되어 온갖 억울함과 서러움이 명치에서 급체를 했다. 스물 여섯살, 공항에서 엉엉 울었다.


여행은 원래 사서 고생이다


여행자는 시스템과 시스템사이를 이동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국가, 항공사와 항공사, 이 공항에서 저 공항까지 잘짜여진 시스템의 연계 속에서만 우리는 여행을 잘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날따라 조금씩 어긋난 균열이 모여 발 앞에 거대한 암흑 구덩이가 됐다. 나는 무관심한 시선 속에 깊이를 모르고 칠흙같은 어둠으로 빨려갔다. 연락할 방도가 없어 대사관에도 한국 항공사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는 어찌나 무섭던지.


생각해보면 여행의 본질이 그렇다. 우리는 일탈이라 미화하지만 모든 안전장치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지는 것이다. 여행 전 각종 구글링으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도 사실 진짜 최악은 우리 상상밖에서 일어난다. 날 울린건 소매치기도 베드버그도 아니고 10분 연착이 일으킨 연쇄작용이었다.


 이후 공항에서 눈이 빨개 돌아다니는 나를 처리하기 위해 수많은 항공사 직원이 달라붙었다. (모두가 여전히 귀찮아했지만 우는 애를 처리해야하는 분위기였다.) 어찌저찌하여 이스탄불에서 카타르를 거쳐 인천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하루 꼬박 보낸 후 집에서 잠에 드는데 방 천장이 눈물나도록 아름다웠다. 감상에 젖어 한동안 여행 소리 안 할거라고 인스타그램에 다짐의 글을 올리고 잠에 들었다.

인천에 도착할때 쯤 한국 섬을 발견하고 눈물겹게 반가웠다.

물론 며칠 뒤 생각을 바로 고쳐먹었다. 아무래도 나는 곧,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떠날 짐을 쌀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몇 달이 지나니 또 공항가는 길을 상상하며 설렌다. 이전 여행의 고난은 아름답게 채색됐다. 내가 여행때마다 되새기는 문구가 있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 여행은 이상과는 다르고, 우리를 언제든지 콕콕 찔러댈 수 있는 현실이란 의미다. 이 악마같은 매력에 끌려다니는 이상 나는 앞으로 더 철저하게 최악에서 살아남도록 대비하는 수 밖에 없겠지. 흑.






작년 두달을 여행하며 보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씩 풀어보려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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