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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an 08. 2019

힙합은 한 소년의 발명품이었다

인류 최초의 힙합 파티를 가보다_ 넷플릭스 <힙합 에볼루션> 1화

한국 힙합 역사상 최다 조회수 유튜브 2500만뷰를 이룬 이분

 2018년 하반기 나의 큰 즐거움은 쇼미더머니777 본방 사수였다. 매주 금요일이면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집 가서 쇼미더머니 재방송이라도 봐야지' 라며 만남을 갈무리했다. 나는 힙합 문외한이지만, 쇼미더머니를 보는 건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전 세계 미디어를 장악한 이 힙합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마침 넷플릭스가 추천해준 이 다큐
<힙합 에볼루션>!


  이런 취향의 반영인지, 최근 넷플릭스가 다큐 <힙합 에볼루션>을 추천해줬다. TV 방송계 퓰리처라 불리는 피버디상 수상작으로, 1970년대 힙합이 태어나 8, 90년대를 거쳐 세계적 음악이 되기까지 장르의 격변을 담아냈다. 1화는 힙합의 탄생을 복기한다.


 내가 가장 놀랐던 , 탄생 50년이  안된 힙합은 시작이 놀랍도록 분명하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힙합 파티를  , 힙합 비트의 토대를 만든 사람(DJ), 옆에서 마이크를 잡고 추임새를 넣은 사람(MC),  음악에 춤을  사람(B-boying)..  이제는 얼굴에 검버섯이  힙합의 전설들이 나와 1970년대  힙합이 탄생한  날을 얘기한다.


시작은 뉴욕 남부 브롱크스였다.



South bronx

악명높은 갱단 Savage skulls, 당시 브롱크스 거리는 갱단이 지배했다.
뉴욕 지도.  할렘가 옆 남부 브롱크스

 

힙합은 할렘가의 음악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힙합은 할렘보다 더욱 절망적인 곳에서 태어났다. '남부 브롱크스에 비하면 할렘은 천국'이라는 말이 있다고. 1970년대 뉴욕 남부 브롱크스는 강도, 상해, 약물 등 미국 최악의 우범지대였다. 특히 방화는 1년에 만 건 이상 발생했는데, 지역 건물주들에게 화재 보험금이 임대료보다 더 좋은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건물주와 세입자는 도시에 넘쳐나는 갱들에게 방화를 사주했고, 이 지역 어딘가에선 늘 건물이 타고 있었다. 당시 근무했던 소방관은 '항상 희뿌연 연기가 도시에 자욱했다'고 회상한다. 갱들이 장악한 거리와 방화와 범죄로 불안에 떠는 도시에서 흑인의 삶은 절망적이었다. 사이렌 소리 가득한 이 범죄 지역에서 힙합이 터져 나왔다.

'The Bronx is burning'
폐허가 된 브롱크스를 방문한 지미카터



세계 최초 힙합 DJ kool herc

오른쪽이 힙합의 아버지, DJ 쿨 허크다
현재 모습


 힙알못인 나는 힙합 하면 에미넴, 우탱클랜 같은 랩퍼 이름부터 먼저 떠올리지만, 태동기 힙합은 DJ의 음악이었다.  "Founder of Hip-Hop" , "Father of Hip-hop". DJ 쿨허크(DJ Kool herc)의 수식어다. 자메이카 출신인 그는 1973년 남부 브롱크스 한 지하 오락실 파티에서 인류 최초로 힙합을 만들게 되는데... 그의 나이 16세였다.

 

Hip-hop Birthday!

힙합의 성지, 1520 Sedgwick avenue

 시작은 이렇다. 새 학기를 맞은 신디 캠벨(Cindy Campbell)은 새 옷이 필요했다. 돈 벌 궁리를 하다 본인의 생일 파티를 입장료를 받을 파티로 기획한다. 파티 공간은 살던 세즈윅가 1520번지 아파트의 지하 오락실을 빌리고, 가족들에게 일손을 요청했다.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고 아버지가 마실 것을 구해왔다. DJ는 친오빠에게 부탁했는데, 이때 부탁받은 쿨 허크(본명 : 클라이브 켐벨)가 아버지의 음향장비를 빌려 음악을 틀었다.

'DJ KOOL HERC PARTY' 파티 초대장

 힙합 등장 이전 1970년대는 디스코 음악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화려한 정장과 실크 드레스를 입고 경쾌한 춤을 추는 음악은 남부 브롱크스 흑인들과 맞지 않았다. 쿨 허크는 펑크와 R&B 음악으로 파티를 열었다. 지역 흑인들은 간주(Break)의 드럼 비트에 맞춰 전신을 쓰는 과격한 춤을 췄다. 쿨 허크는 이들을 브레이크 보이즈(Break boys) 라 불렀다.


 쿨 허크는 브레이크 보이즈의 흥을 돋우기 위해 전에 없던 DJ 기술을 선보였다. 최초로 두 개의 턴테이블을 나란히 놓고,번갈아 틀며 리듬감이 강한 브레이크 부분을 무한 반복했다. 가사 없고 무거운 베이스의 음악은 춤추기에 매우 좋았고, 사람들은 이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에 열광했다. 이날 쿨 허크가 시도한 기법은 힙합 사운드의 토대가 된다.

지금은 익숙한 더블 턴테이블을 처음 쓴 쿨허크
그 전에는 턴테이블을 하나만 썼기 때문에, 한 노래가 끝나고 다음 노래 틀기까지 1분정도 간격이 있었다고 한다
쿨허크가 DJ기술을 쓰면 장비가 쉽게 가열됐다. 그래서 달아놓은 선풍기


최초의 MC, Coke La Rock

코크 라 록과 쿨허크

 

여기에 쿨허크는 본인의 고향인 자메이카 음악 특색을 섞는다. 토스팅 기법(Toasting)이라는 건데, 전통적으로 자메이카 DJ들은 즉흥적으로 음악 중간에 보컬을 섞었다. 이날 파티에서도 쿨 허크의 친구가 마이크를 들고 중간중간 말로 관객 호응을 유도했다. 이 사람이 바로 최초의 MC로 평가받는 코크 라 록(Coke La Rock)이다. 처음에 그는 친구들의 이름을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의미 없지만 듣기 재밌는 말들을 멘트로 사용했다. 그가 자주 썼던 멘트는 지금도 자주 MC들이 사용한다.  


 'You rock and you don't stop'
'Hotel, motel, you don't tell, we won't tell'



힙합의 토대

힙합의 4요소가 이 시기에 자리잡는다. DJ와 랩,
비보잉
그래피티까지!
힙합의 전설들

  쿨 허크의 파티는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날 지하 오락실에 모인 300명의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자신들의 동네로 돌아가 음향 장비를 구해 쿨 허크의 음악 기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날 파티에 훗날 '힙합의 레전드'로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 플래시, 아프리카 밤바타가 있었다.


뉴욕 흑인 사회에 힙합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렇게 1970년대 힙합의 토대가 마련됐다. DJ 비트에 보컬이 얹어지고(), 당시 거리 미술(그래피티)  노래에 추던  (비보잉) 결합하며 힙합음 하나의 거대한 문화 흐름으로 자리 잡는다. 뉴욕 최하층민 흑인들의 메시지는 그렇게 무거운 드럼 비트를 타고  서구 사회에 울려퍼졌다. 또한 힙합 파티는 좋은 사업이 되며 흑인 사회를 바꾸었다. 이후 일부 흑인 갱단은 폭력성을 거두고, 예술성을  음악 집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힙합은 반세기가 흘러 동쪽 한반도의 음악의 주류를 차지한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수많은 힙합 뮤지션들과 그들을 동경하고 적극 따라하지만 어딘가 어설픈 사람들 -소위 힙찔이-을 무한 양성했다. 나비의 날갯짓도 이런 날갯짓이 또 있을까. 



아참, 브레이크에 댄스를 추던 브레이크 보이즈는 이후 비보이로 불리게 된다




P.S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 처럼 힙합을 발명한 쿨허크도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 거 아닌가.



참고 자료입니다.


Netflix Original <Hip-hop evolution> 1화

https://nypost.com/2010/05/16/why-the-bronx-burned/

http://yesthebronx.org/about/history-of-the-bronx/

https://allthatsinteresting.com/savage-skulls-bronx-1979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_print.asp?code=0500&key=20161014.99002181255

https://www.theguardian.com/music/2011/jun/13/dj-kool-herc-block-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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