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정 Apr 22. 2020

그림을 읽는다는 것

시대를 향한 표현의 방식

(메인 이미지 : Pietro Antonio Martini, Le Salon de 1787 au Louvre, gravure, Paris Bibliothèque nationale. Publié dans "Aux armes et aux Arts", Adam Biro, 1988)



평론(評論, critique) : 사회 전 분야에 대해 평가하는 것. 사물의 가치, 우열, 선악 따위를 평가하여 논하는 행위.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한다는 뜻을 지닌 비평이라는 동의어가 있다.  


프랑스 구체제부터 성행했던 - 지금 전시회의 모체인 - 살롱(Salon) 전에는 많은 문인들이나 귀족들이 모여 출품된 작품을 논하곤 했다. 그러다 시간이 점차 지나게 되면서 전문적으로 그림을 읽고 쓰는 직업인 평론가 혹은 비평가가 탄생했다.


그 사이의 길고 긴 역사적인 내용은 각설하고 (아마 다음의 글에서 다룰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림을 읽고 쓸까? 첫 번째,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루면서 작품에 대한 논평을 할 수 있다. 피카소, 마티스, 반 고흐 등 우리 주변에 출간되고 있는 많은 작가들의 평전들이 그 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삶을 잘 들여다볼 수 있고 더불어 작품의 발전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두 번째, 작가가 겪었던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는 것. 큰 사건은 작가로 하여금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 순간 작품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첫 번째 방식보단 현미경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관찰하는 느낌. 세 번째, 작가가 살았던 그 시대의 미술 운동이나 미술 트렌드에 비교하여 접근하는 방식 (혹은 그 트렌드에 반하여).

미술 비평에 대한 방식은 사실 연구자마다 너무나 상이하고 다양하여 관련된 전공 서적을 읽을 때면 "와 이런 방식으로도 접근할 수 있단 말이야!?"하고 놀라곤 한다. (그리고는 나의 연구 퀄리티를 비교하며 좌절한다.)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의 살롱전에 대한 삽화. 돋보기를 들고 작품을 관찰하려는 진지한 자세가 귀엽다.



가끔 갤러리나 전시를 볼 때, 너무 관람객들을 배려하지 않는 비평문을 보곤 한다. 전공자도 읽기 힘든 수많은 어휘들과 개념들의 나열은 미술을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학문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멀어져 버린 미술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시리도록 차가운 1 급수에 물고기가 살지 않는 것처럼. 여기서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미술에게 정치적 수단이나 도구와 같이 '쓸모'를 증명해내야 한다고 권해서도 안된다 (러시아 사회주의 체제에서 미술의 역할처럼). 미술에 대한 관점은 다의적이어야 하며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신념과 용도에 맞게 취사선택해야 한다. 이때의 신념과 용도에는 물론 관람자의 정신적인 자극을 가능케 하는 감상도 포함된다. (개인적으로 '관람'으로 인한 '정신적 자극'도 미술의 용도라고 보는 편이다. 눈에 즉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삶의 태도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한 세기 혹은 수세기 후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연구할 때, 많은 역사적 사료들을 참고할 거다. 그중에 많은 작품들(물론 건축도!)을 이용하는 나 같은 사람들도 있겠지. 이것은 미술사나 건축사가 아닌 '미술을 통한 사회의 연구'에 가깝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방법론은 한 개인이 똬리를 틀었던 사회를 파악하는 거다. 주요 전공 시대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프랑스/유럽이지만 이번에 한국 작가의 글을 쓰게 됐다. 그의 작품을 읽기 위해 그가 살아온 시대와 활동하고 있는 지금을 파악해보려 노력했다. 그가 살아오면서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 의해 (더 크게는 사회에 의해) 직면해야 할 문제들은 무엇이었을까를 집중적으로 생각해봤다.


작품은 그 자체로 말이 없다 - 물론 화가가 많은 인터뷰나 글을 남겼을 경우를 제외하고. 작품은 작가가 살았던 시대, 작품이 태어났던 사회에 대한 한 사람의 표현 방식이다. 지금 내가 글을 남기는 것처럼, 물감을 개고, 붓을 반복해 만든 시대정신. 그것은 분노일 수도 있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일 수도 있다.

김정희 작가에 대한 글을 올려 보기로 했다. 짧은 토막글에 내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시대를 작가에 빗대어 표현한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잠시 멈춰서 21세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10분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한 명의 사람이 있다.
 그림을 배우고 싶었던 고등학생에게 삶은 형벌처럼 무거운 짐을 주었다. 그림은 사치였다. 미대를 가기 위해 화실을 다니던 그녀는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택했다. 이십 대, 꿈을 좇는 일을 포기하니 고정된 수입이 생겼다. 경제적 수입이 생기니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었다. 역설적이다.


한 명의 여자가 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과 자신의 이름 석자를 지키는 삶에서 균형을 이루려 노력했다. 경제와 양육. 일터에서도 집에서도 모든 것을 해내야 했다.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슈퍼맘’이 돼야 했다.


한 명의 화가가 있다.
 삶에서 그림을 가슴에 묻고 위안을 받고자 가끔씩 꺼냈던 사람. 결국 그녀는 그림에서 안식을 찾았다. 집안을 꾸려갈 수 있도록 해주는 생업 한편에 캔버스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하루치 일이 끝나면 일터에 마련한 자신만의 공간에서 매일 꾸준하게 그림을 그렸다.


이 세 명의 사람은 모두 삶의 여러 시간대에서 본 김정희다. 개인의 삶에 기대어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미술사에서 아주 오래된 방법론 중 하나지만 이 글에서는 먼저 해당 방법론으로 작품들을 해석한 후, 사회적으로 확장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김정희의 그림은 본인의 삶과 살아온 사회를 다루지 않는다면 그저 푸른 성상과 같은 여인이 출현하는 다소 ‘독특한’ 그림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희의 작품 속 블루 마돈나는 푸른 도포와 머리의 두광, 백합이라는 모티프들을 통해 성모 마리아 임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경 속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근엄한 얼굴이나 금을 바른 듯한 넓은 두광은 중세시대나 비잔틴의 이콘(Icône)과 흡사하다. 이콘은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 인물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직접적인 모티프들을 새겨 넣는 것이 특징이다.


성모 마리아의 이콘은 성육화의 목적인 인간의 신화를 실현시킨 최초의 사람을 표상한다. 동시에 성모님의 예외적인 존엄성, 그 인격의 완전성, 그녀가 획득한 거룩함의 높은 경지는 그녀에 대한 전적으로 예외적인 공경을 잘 설명해준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의 존재 전체의 변화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에게 주어진 목표에 이미 도달한 첫 번째 인간임을 상기시킨다.(우스펜스키, 2012)


신성함에 더욱 무게를 주기 위해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근엄한 표정을 지었던 이콘의 성모 마리아들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르네상스 시대가 되어서야 인간의 얼굴을 띄게 된다. 따라서 김정희의 블루 마돈나는 중세 이콘에서 그 이미지를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중세를 거스르며 “무엇도 포함할 수 없는 하느님을 자신 안에 품으셔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그녀가 지금 다시 나타났다. 1960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아온 그녀가 그려낸 성모 마리아는 무엇을 품고 있는 것일까.


김정희 작품의 푸른빛을 띤 ‘블루 마돈나(Blue Madonna)’는 담담한 관조의 눈빛으로 관람객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꽃을 건넨다. 그 흔한 미소조차 없는, 모든 고통을 견뎌낸 눈빛이다. 얇고 예리한 얼굴선, 흰 눈이 서린 듯한 속눈썹과는 대조적으로 차가운 모습. 이는 중세의 이콘을 재해석한 21세기 성상의 모습이다. 또한, 그녀의 두광에서부터 뻗어 나가는 빛들이 조각된 듯, 장식적인 배경 역시 재해석된 성상이라는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이 블루 마돈나 시리즈 작품들은 개인의 시선에서부터 시작해 사회적인 시선에서 좀 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푸른빛의 여인은 관람객을 바라보며 꽃을 건넨다. 여성으로서, 특히 자신의 이름을 간직하고 산 여성으로서 겪은 슬픔, 분노, 애환, 절망 그리고 미술로 도피할 수밖에 없던 그 선택이 담겨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있다. 19세기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로댕’으로 불리지만, 카미유 클로델은 ‘카미유’로 불리는 것처럼, ‘여류화가’, ‘여성화가’라는 단어의 사용을 의식하며 조심해야 하는, 미술계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 사회 전반적인 단면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하는 공부를 못했던 어린 시절이,
 퇴근 후 매일 작업실로 향하는 길 위에서,
 직업과 엄마라는 두 역할이 있음에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개인의 사치스러운 취미로 여겨지는 순간에도,


한 인간의 삶을 관통하며 되풀이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지금의 블루 마돈나가 아닐까. 중세의 이콘처럼 인류의 신화를 위한 목적이 아니지만, 두광을 그릴 때나 도포에 채색을 하는 순간에도 작업실이라는 공간에서 오롯이 한 사람의 외로운 전투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


중세의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영적 자궁의 역할이었다면, 올해 환갑을 맞이한 작가가 보여주는 성모 마리아는 여성으로 살아온 시간에 대한 관조이자 자기표현이며 그리고 본인처럼 살아내야 할, 이후 세대에게 보내는 일종의 독려다. 어쩌면 김정희의 그녀는 프리 마돈나 (Prima donna)로서 세대를 관통할 어떤 울림(Résonance)을 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약 100년 전 1928년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외쳤던 ‘돈과 자기만의 방’을 김정희는 평생에 걸쳐 얻었다. 매일매일 돈을 벌고 작업실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 지금 세상을 살아내는 모든 프리 마돈나를 위해.


글 정수경

(파리 1대학 Université Paris 1 Panthéon Sorbonne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참조문헌

레오니드 우스펜스키, 정교회의 이콘 신학, 정교회 출판사, 2012, p. 5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