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크렁 Jan 04. 2023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 흔들리지 않는 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리뷰

콩나물국 있으니까 챙겨 먹어라. 


가끔 부모의 마음이란 과연 어떤 걸까,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나랑 같이 사는데도 매일같이 오후 2시쯤이면 집에 있는 반찬들의 목록을 나에게 카톡으로 보내곤 한다. 나는 주로 집에서 점심과 저녁을 모두 챙겨 먹는 편이라 냉장고 어느 칸에 고기가 있는지 훤히 아는데도. 


오후 2시에 집에 있는 반찬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액션 코미디 SF 장르라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참 어려운 영화다. 한참 입소문을 타고 끝물즈음에야 겨우 시간을 내어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어떠한 평도 후기도 보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사실 이 영화를 스포하기가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 진행이 빠르고, 화면 전환이 체감상 초 단위로 이루어지며, 내용의 전개와 장르도 5분마다 바뀌기 때문에 관객은 저들의 우주를 넘나드는 모험을 그냥 눈으로만 잘 좇아가면 된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멀티버스 


이 영화에서 멀티버스의 개념은 선택과 결정의 결과에 따른 평행 우주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를 때마다 우주는 갈라지고, 다른 결정을 한 나는 각자의 우주에서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작게는 점심 메뉴부터 크게는 진로나 연인까지. 우주 어딘가에 다른 선택을 한 내가 그 결과 나름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가 술자리에서, 혹은 자기 전에 항상 하는 생각 아닐까.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그 주식을 팔지 않았더라면?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다른 평행우주의 에블린의 삶을 잠깐 훔쳐보며 나는 잠깐이나마 대리 경험을 한 것만 같았다. 다른 우주의 내가 잠깐 궁금했다. 




#2. 버스 점프


영화는 한 단계 상상을 더 해, 멀티버스 간의 점핑까지 가능토록 한다. 다른 평행우주의 내가 가진 능력을 '버스 점프'를 통해 이 우주로 빌려오는 것이다. 버스점핑을 하는 방법이 기가 막힌데, 밑도 끝도 없이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립글로스 씹어 먹기, 열 손가락 사이를 종이로 모두 베는 것 등이다. 진지하게 풀었다면 자칫 우스워졌을 수 있는 소재였는데, 대놓고 우습게 만들어서 B급 코믹 감성을 더하니 나무랄 데 없었다. 



이유 없는 이상한 행동에 이유를 붙인 것이 마음에 든다. 가끔 나는 이유 없는 행동을 한다. 예를 들자면 갑자기 얼굴 근육을 당겨 본다거나, 혀를 찬다거나, 엉덩이를 흔든다거나 그런 행동들. 이 영화는 이런 행동까지 우주의 일부분으로 끌어안는다. 




#3. 에브리씽 베이글 


미국에서 지내던 시절, 나는 베이글과 사랑에 빠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베이글 가게로 달려가서 이것저것 잔뜩 넣은 베이글과 커피를 주문하고, 만든 지 하루 지나서 10개를 1달러에 파는 베이글을 잔뜩 사 와서는 집에서 또 야무지게 크림치즈를 발라서 먹곤 했다. 그 당시 나를 좋아하던 대학 선배는 나에게 잘 보이겠답시고 아침마다 베이글을 사다 줄 정도였으니까. 사실 선물로는 베이글보다 반짝이는 게 더 좋지 않나 싶지만. 


아무튼, 갈릭 베이글과 어니언 베이글을 가장 좋아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에브리씽 베이글이었다. 깨가 잔뜩 올라가 한 입 베어 물기만 해도 우수수 쏟아질 것만 같은 비주얼에 도대체 뭐가 들었을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이름까지.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 베이글이라니, 공포 그 자체가 아닌가. 



이 영화의 빌런인 조부 투바키(스테파니 수)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블랙홀로 에브리씽 베이글을 만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정말이지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었다. 투바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게 아닐까. 모든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역설적인 공포. 역시나, 먹을만한게 아니었어. 




#5. We are all small and stupid. 


이 대사의 정확한 번역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작고 어리석어. 

저 눈알 달린 돌멩이는 저 말을 위로라고 하는 걸까 싶었다.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딸 돌멩이에게 고작 하는 말이 저것이라니. 그런데 갑자기 마음 속 한 곳이 팍 하고 터져버린다. 아직도 이유를 짚으라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여기서부터 엔딩까지 쉬지 않고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놀랍고도 다행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극장 곳곳에서 다들 뭐가 그리 서럽고 힘들었는지 울고 있었다는 후기다. 덕분에 나도 맘껏 울었다. 



대충 80년에서 100년 사이를 산다고 치면, 우리 모두 어느 한순간에는 조부 투바키였던 것이 아닐까. 이토록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돌멩이의 별 것 아닌 한마디가 위로로 콕 박힌다. 뭘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답을 제시하는 대신, 그냥 나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을 안아버린다. 그래, 모두 뭐 다 그런 거지? 




#6.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여기서 전개는 한 번 더 몰아치는데, 갑자기 여태껏 무능해 보였던 남편 웨이먼드(조너선 케 콴)의 활약이 나오기 때문이다. 웨이먼드는 처음부터 에블린을 귀찮게만 했다. 지금 세금 폭탄을 맞게 생겼는데, 이혼 타령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웨이먼드는 차갑고 원칙주의자인 국세청 직원한테까지 이혼 위기를 털어놓는 솔직하고, 온정적인 캐릭터다. 그런데 웨이먼드의 사정을 들은 국세청 직원은 그를 이해하고 심지어 시간을 더 주기까지 한다. 결국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게 만든 건 웨이먼드의 진심이었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문제를 해결할 답을 찾는 데만 몰두하던 에블린은 끝에 몰려서야 웨이먼드의 말을 제대로 듣기 시작한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귀찮게만 여겼던, 그의 진심. 


그리고 그녀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한 무기로 다정함을 선택한다. 포용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안아준다. 그녀가 투바키를 포함한 적들을 모두 다 무찔렀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이유 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은 얼마나 단단하고 강하길래 이 험난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저런 태도를 유지하고 있을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만, 먹고 사느라 바빠서 또 내일이면 잊게 된다. 우리는 작고 어리석음을, 그리고 다정함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강한 무기라는 것을. 


이 영화처럼 이상한 방법으로라도, 가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후 2시에 집에 있는 반찬을 알려주는 다정함을, 바쁘다는 핑계로 카톡을 읽지 않는 나의 나약함을, 그리고 읽지 않은 카톡창에 또다시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엄마의 진심을.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