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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크렁 Jun 20. 2024

내가 카페 문을 열지 않는 이유

넷플릭스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 2024> 감상 후 개인 회고

"요즘 카페 장사는 좀 어때?"


작년에 카페를 오픈하고 많은 지인들의 응원을 받았다. 그 이후로 안부 연락을 할 때 이제 카페 근황은 좋은 아이스 브레이커가 된다. 


오픈 1년 차, 나는 카페 문을 꽁꽁 닫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어떻게 가볍게 말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즉판업을 준비하고 있어, 외근이 잦아서 계속 상주하기가 힘들어, 장사가 잘 안돼서 그냥 다른 일로 돈을 버는 게 빠르더라고, 거짓말은 아닌 여러 가지 이유로 대답하고는 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베이비 레인디어, 2024


넷플릭스에서 한창 화제였던 시리즈를 얼마 전에 모두 봤다. 스토킹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어둡고 깊은 자기혐오와 고백의 이야기에 가까웠다. 단 10초도 앞으로 넘길 수가 없을 만큼 흡입력이 강하고 스토리가 걷잡을 수 없게 진행되어서 그 자리에서 모든 에피소드를 다 감상해 버렸다. 

줄거리: 베이비 레인디어는 스코틀랜드 지방 출신의 감독 리처드 개드가 각본, 제작, 주연을 모두 맡았으며 본인이 20대 초반에 실제로 당한 스토킹 범죄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하여 2024년 공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드라마이다. (출처: 나무위키)


#1. 작은 호의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


바에서 일하고 있는 도니는 손님 마사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마사의 이야기도 대충 받아주고, 음료 한 잔을 서비스로 내어준다. 도니와의 대화가 즐거웠던 마사의 스토킹은 시작되고, 도니의 끊임없는 고통은 한 번의 작은 호의에서 비롯되어 시작된다. 


마사가 끊임없이 보내는 문자 메시지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나는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와 짧은 장거리 연애 끝에 이별했다. 조금의 슬픔과 약간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던 어느날,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 한명이 만나보자고 했다. 딱히 내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자리에서 거절했다. 


쿨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던 그가 내 기숙사 앞에 나타났던 건 그다음 날부터였다. 밤늦게 귀가하는데 기숙사 입구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뭐하냐는 물음에 그는 내 생각이 나서 왔는데 붙잡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니 무시해도 된다고 한다. 그래, 하고 그냥 홀랑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그가 몇 시까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음날부터 한 달간 그는 매일 같은 자리에 이어폰을 끼고 앉아 있었다. 어느 날은 술에 취해, 어느 날은 울면서, 어느 날은 나를 다시 설득하려고 그는 매일 찾아왔다. 어렸던 나는 그를 달래볼 너그러운 마음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무시하고 또 무시했다. 친구들에게 들리는 말로는 밥도 먹지 않고 그냥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간다고 하는데, 동네 창피하게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숙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보면 일부러 더 무시하고 상처를 주는 발언을 일삼았다. 이상하게 그럴수록 그의 집착은 심해졌고, 총기가 허용된 국가에 살던 나는 결국 다시 생각해 볼게라며 회유책을 써서야 그를 돌려보낼 수 있었다. 마사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 후에도 꽤 많은 문자를 보냈고, 나는 한번도 답장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호감을 느낀 이유는 정말 사소했다. 

우리 기숙사 지하에는 낡은 포켓볼 다이가 있었는데, 나는 거의 당구장 주인마냥 거기서 노닥거리곤 했다. 어느 날 놀 사람이 없던 나는 별로 친하지 않던 그에게 내기 당구 한판을 권했다. 한참을 놀다가 지겨워진 우리는 라운지에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그가 갑자기 유년 시절 얘기를 하는 것이다. 크게 관심이 없던 터라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정도로 대답하고 마침 내가 읽고 있던 책이 떠올라 읽어보라며 숙소에서 가져다 선물했다. 그는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기억이라고 칭했다. 




#2.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시야를 가릴 때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싶은 도니는 에든버러 축제에 공연을 하러 참가하게 되고, 우연히 좋아하는 작품인 <코튼 마우스> 작가 대리언을 만나게 된다. 대리언의 조언으로 도니는 처음으로 성공적인 공연의 경험을 맛본다. 


성공에 대한 욕망과 인정받는다는 행복감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결코 아니었던 대리언에게 마약 투여, 그루밍 성폭력을 당하게 된다. 피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움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도니의 자아는 망가지고 자기혐오는 심해져 간다. 


그는 결국 한 무대에서 공연을 하던 중 breakdown이 오면서 본인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는데, 그 영상이 온라인에서 바이럴되며 도니는 한순간에 그토록 바라던 유명세와 인기를 얻게 된다. 



회사에서 근무할 때 이사님은 나를 특히 예뻐했다. 이유는 본인 아들이 내가 나온 대학에 지원했다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 다니기 아까운 인력이라고 상사들 앞에서 나를 치켜세워주시기 일쑤였고, 자기가 키워보겠다며 여러 가지 업무들을 나에게 맡겼다. 신입이었던 나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정말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고, 높은(?) 분들만 만나는 회식 자리에도 인맥을 소개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자주 불려 나가곤 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 일이 터졌다. 술에 잔뜩 취한 그분이 내 허벅지에 손을 올린 것이다. 어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말을 못 했다. 나도 취해있었기 때문에 사리 분별이 흐린 것도 있었고, 그날 밤 나는 네이버에 직장 내 성추행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다 잠이 들었다. 


전사 회식이 있던 다음 날 아침에 우리 팀 대리님이 나를 카페로 불러냈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이사님이 여직원들에게 불필요한 스킨십을 많이 했는데, 다 같이 정식으로 항의하려고 한다고.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나는 엉엉 울면서 내 탓이라며 죄송하다고 했다. 내가 받았던 인정이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던 걸까, 평소에 싫어하거나 따르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진작 말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회식 자리에 따라가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바보같이 망설여서 피해자가 늘어났다는 자책감이 나를 감쌌다. 


회사의 반응은 뭐 대충 이랬다. 

"나는 더한 일도 많았어. 이 정도는 참는 게 앞으로 사회생활 하기 편할 거야." - 팀장님, 여성

"그냥 넘어가~ 괜히 말해봤자 너네만 힘들어" - 과장님, 남성

"솔직히 너네 말을 어떻게 믿어. 그랬다는 증거도 없잖아. 거짓말일 수도 있고." - 인사팀장님, 남성

"술 먹고 실수했나 보네. 사과받고 앞으로 회식 자리에는 가지 마." - 과장님, 남성

아, 그때는 정말 화가 났다. 

2주 동안 아무리 면담을 해도 진전이 없었고, 대표는 관심도 없었다. 참다못한 나는 피해자 중 유일하게 그룹사에서 발령된 인원이었기 때문에 총대를 메고 기획조정실에 찾아갔다. 기획조정실은 계열사 대표들의 인사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대표가 가장 어려워하는 곳이다.


실장님은 판단이 빠르신 분이었다. 특히 나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평소 많이 신경 써주시던 감사한 분이기도 했기 때문에 면담을 요청한 지 한 시간 만에 회의실을 잡아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실장님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짧고 명확한 사과와 위로의 말씀과 함께 바로 회사 대표와 인사실장을 소환해 버렸다. 일사천리로 일 처리가 진행되었다. 기획조정실 연락을 받은 대표와 인사팀장은 당일에 우리에게 사과했고, 이사님은 해고되었으며, 현금 보상과 더불어 무상 휴가와 심리 상담 비용까지 지원되었다. 


심리 상담을 받으러 다니는 기간 동안 (물론 업무시간에 다녔다) 나는 수치심보다는 자책감에 더 많이 시달렸다.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그 감정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주변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말을 할수록 나는 더 그 감정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고, 괜찮아 라고 빈말조차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대신 <예민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사서 곱씹으며 닳을 때까지 읽었다. 혹시라도 책을 부모님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 옷장 안에 깊숙이 숨겨놓았다. 


어느 날 친구를 만나서 술을 마시는데, 친구가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당한 얘기를 꺼냈다. 회식 자리가 좌식이라 치마를 입고 불편해하고 있으니 "오늘 뭐 단거리 하는 날이야?"라는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그녀는 참지 않고 그게 무슨 말이냐며 그런 농담은 성희롱이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리고는 바로 회사의 인사팀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문제 삼았지만, 해당 임원은 고작 1주일 무급 휴가받고 돌아와서는 자기랑 말도 섞지 않고 농담도 하기 힘들다며 욕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그녀의 용기와 순발력에 박수를 짝짝 보내며, 나도 내 얘기를 처음으로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함께 실컷 욕했고, 느꼈던 감정들을 쏟아냈다. 


그다음 날, 나는 옷장에서 책을 꺼내서 중고 서점에 팔았다. 




#3. 우리는 절대 어떤 일을 겪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마사는 혐의를 인정받아 9개월의 형량과 5년간의 접근 금지 명령을 받게 된다. 마사와의 일이 해결된 도니는 과거의 망령인 대리언을 마주하러 갔다가 또다시 인정 욕구에 타협하고 싶은 자신의 감정을 만나고야 만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근처 바에 들어간 도니는 음료를 시키고 계산하려는데 지갑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바텐더는 도니에게 음료를 서비스로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마사와의 첫 만남이 떠오르는 수미상관의 깔끔한 결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결말은 도니에게 마사와 대리언의 흔적이 남아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번 어떤 일을 겪은 사람은, 절대 그 일을 겪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마지막으로 카페 얘기로 돌아와 보자면, 처음에는 동업하던 친구와 함께였다. 함께 운영하던 그가 작년 10월부터 무슨 일인지 잠수를 타버렸고 연락도 안 되고 가게에 나오지도 않았다. 마음이 지쳤겠거니, 하고 기다려봤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기에는 월세 부담이 커서 그냥 그가 하던 일까지 하며 혼자 부지런히 운영해 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남자 사장이 없어진 것을 금방 눈치챘다. 그리고는 점점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매일 찾아오시는 것이 감사했고, 매출이 늘고 단골이 많아지니 즐거웠다. 문제는 혼자 운영한 지 3개월 차쯤 생겨났다. 점점 사적인 질문들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졌고, 하루에도 두세 번씩 들러서 30분이 넘도록 얘기를 하다 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내 옷차림, 외모, 퇴근 시간, 연애, 결혼까지 서스럼없이 평가하고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 불편한 몇몇 손님들은 모두 4-60대 남성분들이다. 


개인적인 일로 가게를 하루 닫게 되었다. 그동안 밀린 일을 하느라 영업은 하지 않고 문을 잠그어 놓았는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 그동안 억지로 버티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니 계약기간까지 월세를 낼 만큼의 돈은 들어있었다. 테이블은 모두 치워버리고 홀은 닫고, 배달 및 단체 주문만 종종 받고 있다. 


몇몇 친구들에게 진상 손님 썰을 풀면서 슬쩍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단골 중에 조금 부담스러운 분들이 있다고.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다른 손님들이 많아도 다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걸고, 할 일이 있다며 대화를 차단해 봤지만 기어코 몇 번이고 불러서 막무가내로 말을 건다고. 대수롭지 않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아? 손님인데 감사해야지"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고, 어떤 친구들은 다양한 대응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실제로 말대꾸를 하거나 차갑게 대하는 것은 도대체가 먹히지가 않는다. 그리고 따지자면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도 없을뿐더러 피해를 당한 사실도 없으니까 이게 참 애매한 것이다. 나는 단지 그들이 내 출퇴근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과, 가끔 가게 앞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조금 두려울 뿐이다.





베이비 레인디어를 감상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피해자로서의 나를 다시 마주했는데, 내가 당시에 겪었던 감정들이 작품 속에 모두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스토킹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피해자로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보면 좋다. 

모든 사람은 어떤 상황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자기 파괴적인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면, 도니가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보는 것을 꼭 추천하고 싶다. 리처드 개드는 본인의 트라우마 속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을 깊고 강렬하게 연기한다.


이제 내가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실 자체로 더 이상 자책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연약한 부분을 마주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기 시작하면 자기혐오가 따라온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약해서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는 힘들고 두려운 것이 마땅하다. 

바텐더가 내미는 무료 음료 한잔에도 도니는 아무렇지 않을 수 없고, 손님이 하는 짖궂은 농담 하나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일의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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