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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라이 Dec 29. 2023

레빈은 시간이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소소한 일상, 작은 행복의 기록 7 -너에게 배운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 눈으로 덮인 세상은 하얗고 반짝반짝했다. 8년 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란 소식에 나는 아이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분명 아이들도 좋아하겠지.'

눈 위에서 개 뛰듯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놀았던 어린 시절도 문득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크리스마스만 아니었어도..."

잠에서 덜 깬 셋째는 눈을 비비며 내게 안겼다. 잠시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목요일에 도착한다니.."

셋째는 내게 안긴 채로 작게 투덜댔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브의 아침, 셋째와 나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검정단면색종이 40매 2개와 초록단면색종이 40매 1개를 주문했다. 입금하고 문구사이트를 다시 보니 빠른 배송을 원하면 주문 완료 후, 전화를 달라고 했다.

"여보세요? 문구점이죠? 방금 주문한 술라이인데요. 색종이 언제 받아 볼 수 있을까요?"

셋째와 나는 스마트폰에 귀를 바짝 붙였다.

"크리스마스가 끼어서 화요일에 발송하면 목요일에 도착할 것 같네요."

사장님은 색종이를 주문한 고객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 안타까움을 담아 대답했다. 셋째는 스마트폰 밖으로 새어 나오는 문구점 사장님의 목소리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급한 대로 동네 문구점에서 사 올까 생각했지만, 셋째는 검은색 색종이가 많~~ 이 필요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셋째는 요즘 '페이퍼 빌드'라는 종이접기 유튜브에 빠져 있다. 일어나자마자 졸린 눈을 비비며 종이 접기를 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던지고 종이접기를 하며, 잠들기 전까지 패드에 머리를 박고 종이접기를 한다. 그런 셋째를 보면 나는 가슴이 찌르르 해진다. 엄마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뭉클해진다. 셋째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종이접기를 하다가 잘 시간이 되면 시간을 잊은 듯 잠자는 걸 새삼스러워한다. 벌써 잘 시간이냐며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한다.




열 살 아이에게 '종이접기'란 과연 무엇일까?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반짝거리는 눈망울로 두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이게 하는 가슴속 작은 불꽃은 무엇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온 '크리스마스'를 순식간에 '크리스마스 때문'으로 바꾸는 그것. 어른의 셈으로 맞지 않는 그것. 투명하고 적의 없는, 자동발사로 뿜어져 나오는, 진지하고 귀여운, 크리스마스를 탓하게 만드는 그것은 무엇일까?


<페이퍼 빌드의 빌드암즈 3호기>


나는 셋째를 보며, 얼마 전 읽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떠올랐다.

한 두둑 또 한 두둑 일은 진척되었다. 긴 두둑도 짧은 두둑도, 풀이 좋은 두둑도 나쁜 두둑도 있었다. 레빈은 시간이 가는 것을 까맣게 잊고 이른지 늦은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의 일에는 지금 그에게 엄청난 기쁨을 가져다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창 일을 하는 사이에 그는 어떤 순간들을 발견하게 됐다. 그 순간들에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잊어버렸고, 일이 한결 손쉬워졌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그의 두둑도 거의 티트의 그것처럼 반반하고 훌륭하게 베어졌다. 그러나 일단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고 보다 잘하려 애쓰기 시작하면, 갑자기 그는 하고 있는 일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두둑도 잘 베이지가 않았다.
레빈은 시간이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몇 시간쯤 베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아마 삼십 분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벌써 한낮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빌드암즈 3호기>



그러나 아이가 사랑하는 일이 아이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이는 가끔 색종이를 구겨 던지고, '엄마~'를 부르며, 내 무릎 위로 올라온다. 구기고, 접고, 또 구기고, 또 접고, 다시 구기고, 다시 접기를 반복한다. 그러더니 이제는 구기지도 않는다.  

며칠 전 아이는 중얼거렸다.

"일단 해 보고 너무 두꺼우면 다시 할 거야."

"잘 안 돼서 기분이 안 좋았는데, 완성될 모습을 생각하면서 했어."

아이를 보며 배운다. 일단 겁먹지 말고 시도해 보기. 잘 안 되면 기분 안 좋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 이지만 꿈을 이룬 그날을 그리며 계속해보기.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글을 쓴다. 일단 써보기. 잘 써지지 않으면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러기에  매일 쓰기.




이제 아이는 내 무릎 위에 올라오며 "엄마~"하고 부르는 횟수가 줄었고, 한 조각 한 조각을 완성한 뒤, 환호성을 지르듯 "엄마~~~!!"하고 부르는 횟수가 늘었다.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시간은 줄었지만, 내 무릎 위에 올라온 아이를 꼭 안는 게 좋지만, 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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