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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정수 Feb 22. 2021

나이에 편견 없는 <오늘의 운세>

26년생의 "새 계획을 세우기 좋은 날"

'편견 없는 할아버지' 짤 세 가지가 한참 유행할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 장면이었다. 홍어를 잘 먹는 조나단(이젠 문제의 인물이 되었나...)에게 한 할아버지가 "자네 부모가 전라도 사람인가?"라고 묻는 짤이다.

'퀴퀴한 홍어를 저렇게 잘 먹다니 전라도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듯 화들짝 놀란 할아버지의 표정을 좀 보라. 피부색은 당연히 안중에도 없다. 어찌나 웃었는지!

 


90대 어르신을 향한 점괘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는 시간대별로 패턴이 있다. 오전 시간 단골 중 하나는 각 신문사 <오늘의 운세>다. 나름대로 전통이 깊은 철학관에서 쓰는 거라 신뢰도가 높은 것인지, 아무튼 꽤 많은 독자가 찾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오늘의 운세>는 열두 동물 띠를 바탕으로 하는데, 읽고 있노라면 은근히 힐링이 된다는 점이 매력이다.


우리 신문의 경우, 96세(한국 나이 97살)까지 운세가 제공된다. 이걸 처음 깨달았을 때, 문득 '와, 참 넉넉하구나'라고 생각했다. 백수를 앞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침마다 오늘의 운세를 찾아보며 "오늘 하루는 이런 걸 조심하며 살아보자" 생각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니 왠지 모를 미소가 떠오른다.




"새 계획을 짜고, 추진하라!"

2021년 2월 22일자 오늘의 운세

재미있는 건, 정말로 편견이 없다는 점이다.

 

2월 22일 자 운세는 25년생 소띠, 그러니까 96세 어르신에게 "단계적으로 실천하면 계획이 성취된다"라고 조언한다. 새벽같이 일어난 정정한 할머니가 이 운세를 보고 하루 계획을 세우며 "오늘도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노력해보자" 다짐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보다 한 살 더 아래인 26년생 호랑이띠에게는 "새 계획을 시도함이 유리하다"라고 격려한다. 95세 어르신께 앉아 계세요, 누워 계세요, 힘드시죠, 쉬세요,라고 하는 대신 "오늘은 새 계획을 세우기 딱 좋은 날입니다!!"라고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2021년 2월 15일자

이것도 내가 좋아하는 날이었다. 25년생에 "발전한 운"이라는 미래지향적 점이 나온다는 것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던 운세. 27년생 토끼띠에게 "현인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 역시 편견 없는 운세의 대표작이다. 아무렴, 현명함은 장유유서와는 크게 관련이 없으니깐 말이다.


2020년 5월 19일자 오늘의 운세

어르신들의 운세가 줄줄이 '일과 성취'에 관한 날일 때도 많다. 위 사진은 작년 5월의 어느 날인데, 팔순 안팎의 독자들에게 "서두르지 말고 노력해나가라", "잘 안 풀리니 마음 편하게 먹고 추진하라", "일할 때에는 지혜를 총동원하라" 등을 조언하고 있다. (그 와중에 34년생 개띠를 향한 "권위적으로 행동 말라"도 눈에 띈다^^)  보통은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어린 학생이나, 직장에서 한창 달리고 있을 20, 30대들에게 으레 해줄 법한 조언으로 생각하기 십상인 말들이다.




운세는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요컨대, 오늘의 운세는 소위 '백발 성성한 어르신'들에게도 어떠한 편견 없이 제공된다는 점이 매력이다. 그들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뒷방 늙은이라든지, 거동이 불가능한 병상의 환자 취급하지 않는다. 새 계획을 세우라고,  혹은 서두르지 말고 추진을 조금 늦추라고, 혹은 사교모임에 나가기 좋은 날이라고, 심지어는 이성과의 관계가 잘 풀리는 날이라고도 조언해준다.

 

이런 것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힐링이 된다. 당신이 몇 살이든, 남자든 여자든,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하루는 공평하게 제공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어떤 하루는 좋을 수도, 어떤 하루는 나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당신 하기 나름"이라고 용기를 주는 것 같다. 어린 사람도 때로는 과감하되 때로는 신중해야 한다고 균형 있게 도와주는 것 같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때로는 지혜가 도울 것이지만 때로는 권위주의를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는 것 같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내 나이의 운세를 가장 먼저 보며, 그다음으로는 최고 어르신의 운세를 본다. 내 운세보다 최고 어르신의 운세를 볼 때 더 많은 웃음이 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운세 같은 건 믿지 않으면서도, 결국은 운세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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