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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Apr 10. 2020

물잔으로 건배하면 되나? 안되나?

그래도 물잔으로 건배하고 싶다면

캡틴 아메리카로 유명한 크리스 에반스 주연의 영화 아이스맨(2012)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I thought it's bad luck to cheers with water” . 물로 건배하는 것은 악운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20대 초반, 물 잔으로 건배했다가 선배에게 한소리 들은 적이 있다. 주스라도 넣어서 건배하라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별로 유쾌한 말은 아니다. 대충 건배하면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물을 마시면 저승으로 가는 문화

그렇다면 왜 물잔으로 건배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일까?  실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동서양 모두 물은 죽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 물이며, 그것을 건너는 순간 세계가 바뀐다. 또 물은 죽음과 동시에 재생을 의미하므로 물을 건넌다는 것은 이승의 존재가 저승의 존재로 탄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불국사 등 유명 사찰의 입구에도 늘 개울물과 다리가 함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이며, 침례교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도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문화도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물을 마셔야만 저승으로 가는 사례도 있다. 바로 오탁수(五濁水)라는 물이다. 오탁(五濁)이란 불교의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서 오란 명·겁·중생(衆生)·견·번뇌(煩惱)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탁(濁)은 범어로' kaṣāya'인데 이것은 오염, 부패, 타락을 의미한다. 즉 오탁악세란 명(命) 등 다섯 가지가 오염되어 타락한 나쁜 세계, 혹은 말세를 말한다. 즉 저승으로 가는 오탁수는 이러한 다섯가지를 끊고 저승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석가모니도 임종 직전 제자들에게 물을 요청

불교의 경전인 장아함경(長阿含経)에도 물과 죽음의 관계가 나타난다. 석가모니가 임종 직전에 제자에게 물을 요청했고, 이후 귀신이 그 물을 석가모니에게 줬다는 것이다. 우리 설화에서 저승으로 가는 여정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자료는 ‘바리공주’와 ‘차사본풀이(주석1)’다. 무당의 조상으로도 알려진 바리공주는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저승에 가겠다고 한 인물로 저승까지의 길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서천 서역국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인도를 의미한다.


일본의 장례식에서는 마츠고노미즈(末期の水, まつごのみず)라고 하여 고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는 관습이 있다. 이것은 고인이 사후에도 목이 마른 것 때문에 고생하지 말라는 배려가 담긴 내용이다. 또, 잔에 물을 담아 건배를 하는데, 이것은 상대방을 저승으로 보낸다는 의미, 생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물로 나누는 것이다.


물로 죽음을 나누는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인은 지하에 흐르는 망각의 강 ‘레테’의 물을 마시고 과거를 잊는다고 믿었다. 불교에서의 오탁수와 같은 이치다. 그래서, 고인을 보낼 때 잔에 물 잔으로 건배를 하며, 고인이 다른 세상으로 무사히 가기를 빌었다. 또 물속에 미래의 무덤이 보인다는 신앙도 있어 건배 제의자의 죽음을 상징하는 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결국, 동양이나 서양, 모두 물을 든 잔은 이별과 죽음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현대에도 물 잔으로 건배하면 안 되는 것일까? 개인적인 견해로는 물 잔으로 건배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옛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다만, 물 잔인 것은 상대방에게 살짝 알려줄 필요는 있다. 술인 줄 알았는데 물이라고 알게 되면 애주가 입장에서는 함께 취하며 솔직해지자는 상황에서 배신감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주석 1 ‘차사본풀이’ 는 사람이 죽었을 때 하는 굿으로 웹툰과 영화 '신과함께'의 모티브가 된 내용이다. 여기서 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강림도령인데, 영화에서는 하정우가 맡았다. 최종적으로 염라대왕에게 가지만, 몸은 이승에게, 영혼은 염라대왕이 가져가면서 저승사자가 된다. 즉, 저승사자는 반은 이승에 있고, 반은 저승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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