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도 비슷한 역사를 가진 위스키 모습
[위스키의 역사, 전통주의 역사]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소주라는 어원은 참 매력 있다. 구울 소(焼), 술 주(酒), 바로 구워낸 술이다. 발효주에 열을 가하면 끓는 점이 낮은 알코올(78도 정도)이 먼저 올라와서 물과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술을 소주라고도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증류주다. 영어로는 스피릿. 발효주의 영혼, 즉 알코올만 뽑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소주는 고려 시대 몽골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몽골은 동유럽까지 정복,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루는데, 이때 중동의 연금술사들에게 배웠고, 그것이 우리나라도 전해졌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관련 링크 1). 그렇다면 중동의 연금술사들이 증류주를 발명했을까?(관련 링크 2) 연금술사 이전에는 증류주가 없었을까?
증류주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증류에 대한 기록은 있다.
증류기술소사(A Short History of the Art of Distillation)라는 역사서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증류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 가열, 분쇄, 혼합, 여과 등 증류와 관련된 여러 단어를 볼 수 있다. 연금술의 기본은 물체에 대한 온, 냉, 건,습을 가해서 물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술을 증류했다는 기록은 아직 안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와인에 대한 기화 및 응축에 대해 쓴 내용만 있을 뿐이다. 기록된 역사는 아니지만, 타타르족이 마유에서 증류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및 훈족이 맥주에서 까뮤(Camus)라는 증류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에센셜 오일 및 향수는 만들었다는 것. 이것이 발달되어 증류주로도 이어진다. 중국의 최고(最古) 농업 서적 제민요술(6세기)에는 화주(火酒)라고 나온다. 중국도 향수와 증류 기술은 있었기에 독자적인 증류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한다. 즉, 12세기 전까지 정확하게 증류주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기술은 있었을지 모르나 아직 상용화가 안된 것이다.
연금술에 대한 번역, 유럽 증류주의 시작
서양에 있어서 증류주는 1144년 '연금술의 구성'이라는 이슬람의 연금술을 소개한 문헌이 번역되고 나서다. 당시 연금술은 십자군 전쟁 및 유럽의 상인들에 의해 전래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북아프리카, 스페인으로, 또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그리고 동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이때 영국의 아랍 연구가 '로버트 오브 체스타'가 스페인에 머물면서 '연금술의 구성'이라는 책을 처음으로 번역했다. 이후 영국에 돌아가서 그 지식을 나눴는데 이때가 영국의 위스키 시작이라고 보고 있다. 이후 12~13세기의 성직자이며 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라가 브랜디(와인을 증류한 술)은 만들었다는 논문을 기록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로저 베이컨은 증류주는 몸을 풀어주고 장수할 수 있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증류주는 성직자 또는 연금술사가 만드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마법에서 과학으로,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기술로 들어오는 증류주
유럽의 모든 증류주는 어원을 같이 한다. 북유럽의 아쿠아비트(Aquavit), 위스키의 어원인 우스개 바흐(uiscebeatha), 프랑스의 오드 비(Eau-de-Vie), 동유럽(폴란드 및 러시아가 원조)의 보드카(지즈 데냐 보다'(Жизденя вода)) 등 모두 같은 어원이다. 바로 생명의 물. 증류주가 중세 시대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의 <치료제>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록에 의한 최초의 증류주(정확하게는 위스키) 허가는 의사에게 주어진다. 1506년, 영국의 제임스 4세로 당시 이발사이며 외과의사 조합에게 증류주 독점권을 내주는 것이다. 이유는 술을 마시고 취하다기보다는 고귀한 약으로 썼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술을 귀하게 여기는 약주라는 말이 나온 것처럼 말이다. 즉, 연금술사 및 수도사들이 만들다가 드디어 전문영역인 의사인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마법에서 과학으로, 신의 손길에서 인간의 기술로 들어오는 중요한 포인트다.
위스키와 어원을 같이 하는 약주
참고로 조선시대 궁중에서 술을 빚던 기관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수라간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르다. 바로 궁궐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국, 내의원이다. 조선에서도 의료기관에서 술을 빚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술도 약주라고 불리는 것이 이러한 배경 중 하나다. 결국 위스키, 보드카 등 유럽의 증류주와 한국의 약주는 그 어원을 같이 한다고 볼수 있다.
영국에서 내린 금주령. 하지만 바로 푸는데..
영국에서는 1579년 의사 조합에게 제조 독점권을 준 이후로 전분질의 곡물을 사용, 증류주(위스키)를 만드는 것이 널리 퍼진다. 하지만, 이 증류주 제조가 너무 많은 곡물을 사용한다고 판단, 기근을 일으킬 수 있다며 금주령을 내린다. 하지만 모두가 못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귀족 및 신사 계급 이상은 만들 수 있고, 또 마실 수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금주령 시대, 탁주를 마신 서민은 잡히고, 청주를 마신 양반은 잡히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또 독일의 맥주 순수령 배포 시, 귀족들은 보리 맥주가 아닌 밀 맥주를 마실 수 있게 허용한 이치와 같다. 근현대의 우리나라도 쌀로 술을 못 빚게 하던 60,70년대 쌀로 막걸리를 빚어서 청와대에 납품했다는 인터뷰가 있다. 결국 가진자를 위한 법, 무전유죄, 유전무죄와 같은 모습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금주령은 1644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때 스코틀랜드 정부가 생각을 달리한다. 바로 이 증류주가 부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임을 안다. 바로 주세, 세금이었다.
조선에서의 금주령
우리나라에서도 금주령이 자주 있었다. 특히 흉년이 들거나 하면 늘 금주령을 내렸는데, 약으로 쓰거나 생계를 위한 자는 면제가 되었다. 결국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종실록에는 탁주를 마신 자만 잡혀가고, 청주나 소주 등 고급술을 마신 자는 빠져나간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금주령의 끝판왕이 있었는데 바로 영조다. 영조는 재위 기간 52년 동안 무려 50년을 금주령을 내린다. 윤구언이라는 신하는 술단지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처형될 정도였다. 이러한 금주령을 모두 푼 왕이 바로 영조의 손자 정조. 간헐적인 금주령은 있었지만 그는 금주령 자체를 싫어했고, 덕분에 주막 등 민간 상업이 발달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성장, 그것은 영국과의 통합
스코틀랜드의 위스키가 본격적으로 소비가 된 것은 1714년 이후라고 본다. 이유는 이때 잉글랜드와 통합되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적으로 협력하게 된 스코틀랜드는 이때부터 양국의 증류주에 과세하는 금액을 똑같이 맞췄다. 다만, 잉글랜드하고 가까운 로랜드 지방은 신교도들이 많아 협조가 잘 이뤄졌지만, 북쪽의 하이랜드 지방은 가톨릭 신도가 많아 협조가 어려웠다. 또 대외적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많은 영국 입장에서는 세수를 얻기 위해 몰트, 증류기, 증류액까지 모두 과세대상으로 했다. 이러한 원인으로 스코틀랜드에 밀주가 많이 생기게 되고, 이러한 밀주를 동굴의 오크통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발견, 오크통 숙성의 위스키가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참고로 당시 밀주업자들은 다양한 곳에 증류주를 숨겼는데, 다리 밑, 집안의 지하실, 증류기의 증기는 굴뚝으로 연결을 시켰고, 술을 이동할 때는 관에 넣어서 이동하기도 했다. 또 절대로 마시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살충제(sheep dip)라는 이름을 달기도 했다. 현재 살충제라는 의미의 'sheep dip' 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가진 체 고급술로 팔리고 있다.
영국은 스코틀랜드 제조업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제재를 가했다. 특히 증류소에 갑자기 들이닥치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밀매업자들이 아예 암살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세무 공무원에게 술을 주고 세금을 줄인다든지의 꼼수도 여기서 나오게 된다 결국 1983년 세무 공무원에 의한 조사는 끝이 난다.
결국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협력관계는 19세기나 들어와 보다 친화적으로 바뀐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확장에 따라 스코틀랜드 위스키는 날개 돋치듯 팔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유통기한이 없는 위스키는 관리 역시 용이했다. 영국의 상류층에서는 정기적으로 스코틀랜드에 가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도 늘어났다.
다만 힘든 역사도 있었다. 세계 1, 2차 세계대전 때는 위스키보다는 공업용 알코올을 만들라는 정부의 지침도 있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와인, 성장하는 위스키
위스키가 아무리 성장한다고 해도, 실은 스코틀랜드 사람이 만드는 알코올에 지나지 않았다. 서민이라도 우선은 맥주나 와인으로 시작해서 브랜디나 리큐르로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증류주의 최대 소비는 위스키가 아닌 브랜디였다. 이것이 1860년대부터 이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포도원에 필록세라라는 어마어마한 병충해가 등장, 당시 와인 산업을 전멸 시켰기 때문이다. 덕분에 와인을 증류하는 브랜디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고, 병충해에서 자유로웠던 위스키가 더욱 뜨게 된다. 결국, 위스키가 뜬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대영제국의 힘을 빌린 것, 그리고 19세기에 와인과 브랜디 산업이 위기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국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는 지금처럼 고급스럽지도, 또 특별한 태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힘들게 밀주로 만들고, 잉글랜드와의 협력을 통해 여기까지 온 것도 있다. 지금의 위스키의 위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들도 의사들이 술을 만들었고, 우리 역시 내의원에서 술을 빚었다. 그들도 금주령이 있었으며, 우리 또한 조선시대 금주령이 내내 있었다. 결국 동일한 역사의 반복일 뿐이다. 그들이 잘 한 것은 기회를 잘 살리고, 또 산업혁명과 식민지 사업을 잘 한 것뿐이다. 그들을 깎아 내리는 뜻이 아니다. 존중하고 충분히 배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하나씩 우리 전통주와 한국의 술을 브랜딩 해 간다면, 당장은 아니라도 10년, 20년이 지나면 달라진다는 것이다. 급히 생각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갈 필요가 있다. 좋은 문화는 당장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 세월이 만들어 준다. 그 세월 속에 우리가 하나씩 문화를 채워나가면 된다. 기회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을 때 도둑처럼 찾아온다. 그 누구도 생각 못 했던 한류의 도약처럼 말이다.
참고문헌 : Kevin R Kosar Wiskey : A Global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