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애달픈 역사와 맛, 그리고 멋이 있는 곳 목포
종착지와 출발지인 목포
서서울 톨게이트를 출발, 약 4시간을 외길만 달리면 도착하는 곳이 있다. 충남의 끝자락 서천, 전북의 초입인 군산, 복분자의 마을 고창을 지나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 바로 목포다. 한반도 남서지방의 끝자락에 있어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며, 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작을 상징하기도 하다. 영화 <목포는 항구다>에서 거친 남자들의 모습을 보였으며, 1935년 지어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는 한때 해태 타이거스의 응원가로 등장, 전남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금의 60대 이상에게는 최고의 추억이 되는 술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바로 삼학 소주. 목포의 삼학도에서 이름을 따온 이 소주는 1970년 전까지 전국을 아우르던 대한민국 최대 소주 회사였다.
대한민국 1위였던 삼학소주
삼학소주의 인지도를 알 수 있는 기사가 수년 전에 등장했다. 삼학소주의 부활이란 대의명분 아래 2012년 기공식이 열린 것이다. 당시 이 삼학소주의 부활을 주도한 회사는 8억 원을 투자받았으나 주류제조면허가 없다는 이유와 기공식을 한 곳이 공장부지가 아닌 이유 등으로 사기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결국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으면서 혐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삼학소주 부활에 투자한 연령대가 대부분 6, 70대였다는 것. 1970년대까지 삼학소주의 점유율이 무려 70%나 되었기 때문이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 지역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의 삼학소주는 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정치보복을 당한 비운의 소주?
삼학소주는 1947년 목포양조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삼학이라는 이름은 목포의 삼학도에서 딴 이름. 유명 가수인 남진 씨의 부친인 김문옥 씨도 경영자로 참여했다. 원래 목포양조주식회사란 이름답게 본래 청주와 주정(양조용 알코올)을 만들던 곳이었다. 하지만 1965년 국산 곡물로 술을 빚어서는 안된다는 양곡관리법이 시행된 이후, 삼학소주는 발 빠르게 희석식 소주로 전환한다. 서울에도 대량생산시절을 구축했으며, 너무나도 인기가 많은 나머지 생산이 따라가지 못해 가짜 삼학소주까지 등장하게 된다. 이때 삼학소주에 메탄올 함량이 검출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결국 그것은 가짜 삼학소주로 밝혀지며 누명에서 벗어난다.
당시 삼학소주의 직원은 600~700명으로 월 소주 생산량 300만 병 가까이 되었고, 60년대 후반 납세 실적이 진로소주의 2배를 넘을 정도로 거칠 것 없는 회사였다. 하지만, 1971년 납세필증을 위조하고, 탈세라는 명목 아래 3억 2천만 원을 추징당하고, 최종적으로 73년 부도 처리된다. 너무나도 승승장구하던 회사가 급작스럽게 없어지자, 끊임없는 음모설이 나돌았다. 바로 삼학소주가 호남이라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려들었다는 것. 그 배경은 김대중 대통령 후보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했다는 이유였다.
삼학소주 관계자는 음모설 등은 사실과 다르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목포에서는 비운의 삼학소주라는 이름 아래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고종이 연 최초의 근대항
목포는 1897년 고종이 연 최초의 근대항으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에 나오게 된다. 특이한 것은 자발적 근대항이라는 것.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강제로 개항한 부산항, 인천항, 원산항과는 달랐던 곳이다. 목포라는 지명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목이 중요한 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목포에는 큰 목(대항)이라는 곳과 소목(작은 항)이라는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목포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왕건이 궁예 휘하의 장수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왕건이 서남부 일대를 복속시키고 수군을 이끌고 도착한 곳이 목포라는 것. 그리고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무진주를 위협했다는 것이다. 단, 여기서의 목포는 지금의 목포시가 아닌 영산강 유역의 나주시라는 설도 있도 있어서 정확한 자료는 아니다. 지금의 목포와 일치하는 기록은 조선 태종 때로 이곳에 목포진(木浦鎭)을 설치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목포는 당시 무안군의 일부였으며, 이러한 행정구역은 1910년 일제강점기 때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정되면서 지금의 목포로 자리 잡게 된다. 결국 목포라는 이름보다는 무안이란 이름이 컸던 지역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 문화가 그대로 있는 곳
목포의 거리를 보면 의외로 반듯하다. 유달산 아래는 난개발이 많지만 목포역 남동쪽은 반듯한 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다. 상당 지역이 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계획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호남에서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쌀과 면화의 수탈 항구였다.
그래서 광양, 군산과 함께 호남 3대 항구의 하나였으며 1940년대만 해도 부산, 인천, 원산과 함께 4대 항구 중 하나였다. 당시 일본의 영사관이 이곳에 있었으며, 경제적 지배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도 목포에 지점을 두었다. 또 목포와 신의주를 연결하는 국도 1호선과 부산으로 가는 2호선 역시 목포가 기점이었다. 이러한 길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구 목포 일본 영사관. 1900년에 설립된 이곳은 현재는 목포 근대 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당시의 쓰라린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남도의 맛이 모이는 곳, 그리고 시작하는 곳
국도 1, 2호가 이곳이 기점인 듯 이, 목포는 마지막이자 시작인 곳이다. 덕분에 이곳에는 남도의 산해진미가 모인다. 세발낙지, 홍어삼합, 민어, 꽃게무침, 먹갈치, 병어회, 준치무침, 아구탕, 우럭간국이 목포를 대표하는 9미다. 세발낙지는 무안뻘, 신안뻘과 해남뻘에서 잡히는 것이 주로 이 목포로 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로 치는 것은 무안과 신안이다. 특히 무안은 갯벌이 넓고 타지에서 잡히는 돌낙지보다 더 쫄깃하다고 평한다. 물론 가격도 20~30% 정도 더 높다. 세발낙지의 경우 발이 가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일반 낙지와 다른 종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은 어려서 작은 것뿐이다. 홍어 삼합의 경우 의외로 삭히지 않은 생홍어가 많은 곳이 이 목포다. 원래 홍어는 흑산도에서 잡혀서 나주나 목포로 오면서 자연스럽게 삭혀졌다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홍어를 다양하게 즐기는 소비층이 생기면서, 목포에서도 굳이 삭힌 홍어만 고집하는 경우는 적어지고 있다. 일부 목포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안 삭힌 홍어도 충분히 맛있는데 왜 굳이 삭히냐고. 그래서 목포에는 삭힌 홍어와 생홍어가 모두 준비되어 있다. 삭히지 않은 생홍어는 오히려 암모니아 향도 적게 나고 찰지면서 부드러운 맛이 있다. 하지만 홍어의 특유한 향은 살아있어 여운이 길게 남는다. 아무리 삭히지 않더라도 홍어만의 매력은 지닌 것이다.
목포만의 막걸리를 즐긴다면?
이번에 방문한 목포의 식당은 두 곳이었다. 목포 해안도로의 유달산 아래 자리 잡은 '선경준치횟집'. 또 한 곳은 옥암동에 위치한 '인동주마을'이다. '선경준치횟집'은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8,000원에 즐길 수 있는 준치회무침, 병어회무침, 그리고 12,000원짜리의 먹갈치 구이도 인기다. 먹갈치는 제주도 은갈치와 같은 종이다. 낚시로 잡아서 비늘이 살아있으면 은갈치가 되고, 그물로 잡어 비늘이 손상되어 색이 어두워지면 되면 먹갈치라고 불린다. 목포에서 잡히는 먹갈치는 두툼하고 기름진 살이 두툼하다. 구워 먹으면 밥 두 그릇은 뚝딱 사라지게 하는 밥 도둑이다. 이때 준치회무침과 갈치구이와 같이 등장한 막걸리가 '목포 생막걸리'. 목포를 주름잡는 대표 막걸리로 밥을 쪄서 빚는 것이 아닌 생쌀 발효 방식으로 만드는 막걸리다. 덕분에 살짝 가벼운 맛이 난다. 참고로 전라도에서는 막걸리를 위술과 아래 술을 분리해서 마시는데, 갈치구이와는 아래 술인 탁주 부분이 생선 비린내를 잡아줘서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옥암동의 '인동주마을'은 30년 전부터, 인동초로 막걸리와 약주를 빚어온 식당이다. 인동초(忍冬草)라는 식물은 말 그대로 겨울을 인내하는 풀이라는 뜻. 덩굴성 관목으로 가을 또는 추운 겨울까지 잎이 붙어 있다. 덕분에 역경을 이겨낸 인물에 비유도 많이 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별칭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동초에 인공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만드는 것이 인동초 막걸리와 평화주라는 약주이다. '인동주마을'에서 만드는 이 술은 인동초에 쌀과 누룩, 감초와 치자를 넣고 발효를 시킨다. 알코올 도수 7도의 막걸리는 15일, 10도의 약주는 20일간 소요되는데, 단맛은 적지만 청량하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즐기는 식사는 역시 홍어 삼합. 일반적인 흑산도산 홍어는 영상 3도에 30일 정도 삭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15일 된 비교적 덜 삭힌 홍어가 등장한다. 자극이 적고 부드러운데, 여기에 잘 익힌 돼지수육과 묵은지, 그리고 인동 막걸리가 한잔 들어가면 목포가 주는 홍어삼합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삼학도에서 즐기는 무료로 즐기는 요트 체험
목포는 요트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것도 무료로 탈수 있다. 월 화 그리고 명절 연휴를 제외한 모든 날에 운영을 하는 이곳은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에 운행을 한다. 약 2시간 남짓,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멋진 풍광과 바닷 바람을 즐길 수 있는데, 특히 목표대교 아래로 지나가며 석양을 바라볼 때가 최고의 뷰로 느껴졌다. 정원은 18명인 만큼 여행 가기 전 사전에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예약은 해양레저포털 (www.oleports.or.kr/)에서 할 수 있다.
근대역사의 보고 서해안 여행. 국도 1호선의 시작인 목포에서 시작해본다면
한때 서해는 동해에 비해 무척 인기가 없는 휴양지였다. 동해와 같이 드넓은 바다도 아니었으며, 갯벌이 많아 물도 깨끗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서해안의 매력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꾸불꾸불한 길에 수많은 섬과 만, 곶, 그리고 수많은 생명의 터전인 갯벌이 세계 최대급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해안은 근대 10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일제의 영사관이 세워질 정도의 침탈의 역사를 가진 목포는 물론, 수많은 양곡이 일본으로 수탈의 현장인 군산과 서천, 그리고 구한말 신앙의 자유를 외치며 3천 명의 순교자가 있었던 서산의 해미읍성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의 생가인 당진의 솔뫼성지, 마지막으로 글로써 일제와 싸운 소설가 심훈의 생가 필경사까지 기쁨과 슬픔의 역사 모두가 묻어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의미로 목포를 기점삼아 서울로 쭉 올라오는 서해안 여행을 시작해 보면 어떨까? 지금 목포는 수서역에서 SRT를 타면 2시간 반 만에 도착하지만, 이럴 때 천천히 가는 여행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단순 목포만 보는 것이 아닌 근대 역사를 담은 서해안의 도시를 모두 둘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가는 여행 속에 근현대가 남긴 역사의 가치와 지켜온 땅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