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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욱 Dec 24. 2018

가진 자들의 논리 속에 살아남은 술

독일의 밀 막걸리, 한국의 쌀 막걸리


인기 인문학 예능 알쓸신잡에서 독일의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t, 라인하이츠거보트)에 대한 언급을 한적이 있다. 1516년, 독일의 바이에른 공국에서는 맥주는 보리(보리 맥아), 물, 홉으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법령을 공포했고, 독일 국민은 이 법령을 존중하며, 자국의 자랑스러운 문화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골자였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지리 시간이나 세계사 시간에도 충분히 배운 것들이다. 독일에는 맥주 종류가 6천 종 이상이며, 각각의 작은 양조장이 각자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는 등이 대표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 맥주 순수령이 무조건 좋다고만 말을 하지 않는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다는 것. 무엇보다 무조건 지켜진 것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 맥주 순수령 450년 기념 우표. 현재는 500년이 넘었다


정치적 이유도 컸던 맥주 순수령

독일의 맥주 순수령 공포 시기는 1516년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독일 전체가 아닌 독일 내 있었던 바이에른 공국의 법령이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제후국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금과는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맥주 순수령이 공포된 배경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맥주의 품질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에는 홉 이외에도 중독, 환각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식물성 재료(그루트)를 넣는 경우도 있어, 마신 사람이 죽거나 병이 들었다는 것이 가장 큰 명분이었다. 이것에 비해 홉은 환각이나 중독 작용은 당연히 없고, 다양한 풍미를 가짐과 동시에 무엇보다 살균작용을 해서 맥주의 품질 유지에 도움을 줬기에 대체 원료로 뽑혔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캐릭터 그루트. 결국 이 캐릭터는 맥주 순수령 이전의 첨가물이었던 그루트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보인다. 출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홈페이지.


하지만 내부를 살펴보면 이 이유 하나만은 아니다. 첫째, 당시 그루트라는 식물성 재료에 대해 전매권을 가진 교회와 영주라는 기득권 층이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독점하여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결국은 구르트를 홉으로 바꾼 것은 기득권 싸움이라는 해석도 분명히 있다.

둘째, 맥주 순수령 이전에는 밀과 호밀로도 맥주를 많이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밀과 호밀의 가격이 많이 올랐다. 결국 주식인 밀 가격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것. 그리고 제빵업계와 양조장간의 갈등을 무마하기 위함도 있었다. 결국 제빵은 밀이나 호밀로, 맥주는 보리로 만들기로 했다.

셋째, 귀족들의 이득을 챙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보리의 전매권을 당시 바이에른 공국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었다. 즉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이유 중의 하나로 보리가 선택된 배경도 있었다.

100% 지켜지지 않은 맥주 순수령. 덕분에 밀 맥주가 유지
바이에른 공국의 맥주 순수령은 맥주의 주원료를 보리로만 하라고 했지만, 알고 보면 독일에는 수많은 밀 맥주가 있다. 바이스 비어(흰 맥주라는 뜻), 바이젠 비어(밀 맥주라는 뜻)들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맥주 순수령에 위반된 이 맥주들은 어떻게 지켜져 왔을까? 사실 주식인 밀로 만든 맥주는 특권층을 위한 제품이었다. 정작 맥주 순수령을 내린 바이에른 공국에서도 귀족들 등 특권층은 밀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나중에는 아예 밀 맥주 독점권까지 만든다. 결국 법령을 내린 지배계층이 스스로 약속을 어긴 것이라는 평도 있을 정도다.

독일 내 퍼진 것은 1871년 통일 이후
뮌헨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공국의 맥주 순수령이 독일 내 퍼진 것은 엄밀히 말하면 1871년 독일 통일 이후다. 그전에는 각각의 지역에서 다양한 맥주를 만들었다. 독일의 통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한 나라는 프로이센이었다.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시킨 최후의 전쟁, 워털루 전투와 그 이후의 보불전쟁에서도 승리하는 등, 독일의 크고 작은 국가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다. 무엇보다 당시 최고의 재상이자 전략가라고 불리는 비스마르크가 있던 곳 역시 프로이센이었다. 바이에른 왕국은 보불전쟁 때 프로이센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항했고, 결과적으로 승전국의 이득권을 가져갔다.

이에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이란 이름으로 통일을 추진하는데, 이때 바이에른 공국(당시 왕국) 공국이 독일제국에 들어가면서 꼭 지켜달라는 조건으로 내놓은 것이 맥주 순수령이었다. 이를 통해 통일 독일에서는 맥주 순수령이 기초 법안으로 선택되고, 대부분의 양조장에서는 이 법률에 따라 맥주를 빚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맥주 순수령은 법률로써의 기능은 잃는다. 당시 EC가맹국들이 독일만 맥주의 원료를 한정한다는 것은 비관세장벽이 있다는 주장을 하며, 의회로 제소가 된다. 이에 EC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1987년 순수령은 비합법화로 전환, 법률로써의 기능은 잃고 문화적 상징으로 남게 된다. 

다만, 독일의 양조장들은 여전히 이 순수령을 따르는 곳이 많고, EU(유럽연합)에서는 이 순수령은 맥주가 독일에 있어서 전통의 식품인 것을 인정하고 있다.

1965년 한국의 양곡관리법. 쌀로는 술을 못 빚어
한국에서도 술 빚을 때 곡물 종류를 제한했던 유사한? 법령이 하나 있었다. 주식인 쌀이 모자랄 때 나온 양곡관리법이다. 먹을 쌀, 보리가 부족하니 관련된 곡물로는 술을 빚지 말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본격적으로 생겨난 막걸리가 하나 있다. 바로 밀 막걸리. 외국에서 수입한 밀가루를 주원료로 한 막걸리로, 막걸리에 향수를 가지고 있는 소비자는 대부분 이 밀 막걸리 맛을 추억 속에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독일 특권층에 밀 맥주가, 한국 특권층에 쌀 막걸리가

앞서 설명했듯이 바이에른 공국의 맥주 순수령 이후, 밀 맥주는 특권층을 위한 존재였는데,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지금이야 너무나도 당연한 쌀로 빚은 막걸리이다.  대통령 막걸리로도 유명한 고양시의 배다리 막걸리는 당시 쌀로 막걸리를 빚어 청와대에 납품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청와대 감식과장과 협의를 통해 보냈고, 쌀도 늘 햅쌀로 빚었다고 한다. 즉, 특권층을 위한 막걸리가 있었고, 당시로서는 그것이 쌀 막걸리였던 것은 분명하다. 

다양성을 해쳤다는 독일의 맥주 순수령, 그리고 한국의 양곡 관리법
수년간 맥주 순수령의 영향력이 적었던 벨기에 맥주 및 크래프트 맥주가 전 세계적인 이슈를 끌고 있다. 이유는 기존의 보리, 맥아, 홉 등 당연히 지켜야 했던 레시피가 아닌, 틀에 얽매이지 않은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존의 고정관념을 깬 맥주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과실을 사용한 맥주는 물론, 치킨을 넣은 맥주, 마른 생선을 넣은 맥주까지 등장을 했다. 이는 맛을 떠나 발상의 전환을 하자는 것이 목적이고, 틀을 깨 보자는 새로운 세대의 도전일 수 있다. 이에 소비자는 열광하고 있고, 거대한 자본이 지배하는 논리에 통합되어가고 있는 맥주 시장의 틈새를 '생각의 전환'이란 콘셉트를 통해 해당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다.

한편, 양곡 관리법은 1990년 개정되면서 쌀 소비 확대를 위해 쌀로 술 빚는 것을 허용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쌀 막걸리가 등장하는데,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수입 쌀이었다. 최근에서야 국산 쌀의 비율이 높아지는 상황이고, 근 40년 동안 한국의 막걸리나 전통주 시장은 고부가가치 문화를 이루지 못한 채, 저렴하고 단순한 주종으로 인식되는데 큰 몫을 한다.  동시에 원료의 풍미가 살아있는 증류식 소주 시장은 깡그리 사라지고, 타피오카나 당밀로 빚은 희석식 소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등 한국은 저렴한 술이 대세인 나라가 돼버리고, 좋은 술은 오직 외국의 술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장면들만 연출이 된다.

법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사례. 맥주 순수령과 한국의 양곡 관리법
결과적으로 맥주 종주국이란 큰 타이틀을 안겨준 독일의 맥주 순수령, 먹을 쌀이 부족하니 수입 밀 등으로 술을 빚으라는 한국의 양곡관리법의 단순한 비교는 무척 어렵다. 독일의 맥주 순수령이 결과적으로 독일을 맥주 종주국으로 만들어줬다면, 한국의 양곡관리법은 다양성을 해치고, 획일화시켰으며, 전통주에 대한 부가가치를 해친 법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확실한 것은 법령 하나가 산업과 문화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것. 그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한다. 우리가 맥주나 전통주를 떠나 법령 하나를 제정할 때 꼼꼼하게 따지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PS: 해당 글은 SBS 라디오 김창완의 아침창, 그리고 SBS 팟캐스트 말술남녀에 출연하면서 언급한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말술남녀는 팟빵이나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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