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점에 가면 은근히 찾아보는 위스키
면세점 위스키 1위? 발렌타인
해외에 나가기 위해 면세점을 지날 때마다 보이는 위스키가 있다. 바로 발렌타인 30년, 그 뒤를 이어 21년, 17년들이 쇼케이스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잘 보이는 이유는 바로 면세점 위스키 판매고 1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9년 인천공항의 조사에 따르면 1위가 발렌타인, 2위가 조니워커, 3위가 로얄 살루트, 4위가 글렌피딕이 차지하는 등,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스카치 위스키 전체에서는 조니워커에 이어 2위. 그렇다면 발렌타인 위스키는 뭐가 특별하길래 이렇게 높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을까?
발렌타인 VS 발렌타인
한국에서의 발렌타인 위스키는 특별하다. 바로 발렌타인 데이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위스키 Ballantine's와 기념일 Valentine's Day는 전혀 상관이 없다. 스펠링이 틀린 것도 당연하고, 발상지, 역사, 서사 등 겹쳐진 것이 거의 없다.
흥미롭게도, 발렌타인 데이는 서기 3세기경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 시대에 순교한 성 발렌티노(Saint Valentino) 사제에서 유래한다. 당시 황제는 군인들의 결혼을 금지했는데, 발렌티노 사제가 이를 어기고 비밀리에 결혼을 주례하다가 순교한 날이 2월 14일이다. 이후 이 날은 사랑과 감사를 전하는 기념일로 발전했으며, 연인뿐 아니라 친구, 가족 등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날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위스키 발렌타인과는 어떠한 역사적 연관성도 없다.
발렌타인 위스키는 어떻게 성장했나
그렇다면 발렌타인 위스키는 어떻게 성장을 했고, 어떤 계기로 전 세계적인 위스키가 되었을까?
발렌타인 위스키의 역사는 1827년, 창업자 조지 발렌타인(George Ballantine)이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작은 식료품점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역시 대부분의 블렌디드 위스키가 그러했듯, 여러 원액을 섞어 일관성 있는 맛을 구현하기 위해 블렌디드 위스키로 전향해 판매를 시작했다.
19세기 발렌타인은 조니워커가 선박 선장(Captain)을 앰버서더로 활용하는 역동적인 마케팅을 펼친 것과는 달리, 권위와 품질을 통한 간접 마케팅에 집중했다. 바로 영국 왕실 워런트다. 1895년, 발렌타인은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영국 왕실 전용 증류주 제조 인가서(Royal Warrant)를 수여받았다. 이는 복잡한 설명 없이도 ‘영국 왕실이 공인한 최고급 위스키’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발렌타인이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블렌딩 왕조로 도약할 수 있었던 핵심은 1930년대라는 격변기에 대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이 시기는 숙성 연산 제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외부 환경이 조성된 시기였다.
1933년은 스카치 위스키 시장에 결정적인 해였다. 영국 주세법에서 위스키의 최소 숙성 의무 기간이 3년으로 확정되었고, 같은 해 미국에서는 14년간 이어진 금주법이 폐지되었다. 이전까지 수출하지 못하고 쌓여 있던 위스키 재고들은 이제 고급 숙성 제품으로 시장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발렌타인 17년과 발렌타인 30년
발렌타인은 이 흐름을 선점하며, 1930년대 후반 마스터 블렌더 조지 로버트슨(George Robertson)을 통해 발렌타인 17년과 발렌타인 30년이라는 고연산 체계를 정립했다. 이후 이들 제품은 상업적으로 본격 유통되기 시작했다. 특히 발렌타인 17년은 당시 블렌디드 위스키 시장에서 보기 드문 고연산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제품으로, 숙성 연산(Age Statement)을 명확히 표기하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세계 최초의 17년 숙성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발렌타인 이전에도 오래된 위스키 원액은 존재했지만, 이처럼 숙성 연산을 전면에 내세워 대규모 상업화에 성공한 사례는 드물었다.
유사한 시기에 등장한 발렌타인 30년은 발렌타인의 위상을 한층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이는 단순히 오래된 블렌디드 위스키를 넘어, 발렌타인 브랜드의 슈퍼 프리미엄 정체성을 확립하는 상징적 존재였다. 30년이라는 시간성이 부여한 상징성은 소비자에게 자연스러운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이는 21년, 17년, 나아가 12년 제품으로까지 브랜드 확장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발렌타인 30년의 맛을 정의하자면 한마디로 부드러움이다. 깊은 꿀 향을 중심으로 배와 복숭아 같은 잘 익은 과일 향, 은은한 견과류의 고소함과 바닐라의 달콤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입안을 감싸는 질감은 우아하고 섬세하며, 농축된 단맛과 스파이시함의 균형, 부드러운 오크 숙성에서 오는 깊이가 긴 여운을 남긴다.
면세점에서 구매하기 딱 좋은(?) 발렌타인 위스키
발렌타인은 높은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폭넓은 소비자층이 접근할 수 있는 ‘접근 가능한 럭셔리(Accessible Luxury)’ 전략을 지향해 왔다. 특히 면세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최고급 위스키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국내 면세점에서 판매되는 가격 또한 전략적이다. 현재 면세 한도는 미화 400달러이며, 2025년 개편으로 수량 제한은 사라졌다. 발렌타인 30년의 면세점 가격은 약 400달러 전후로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할인 혜택을 받으면 대부분 300달러 대에 구매가 가능하다. 주류는 가격이 높을수록 면세 효과가 커지는 만큼, 고급 위스키를 선택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소비가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발렌타인 30년은 면세점에서 선택하기 좋은 최고급 위스키로 자리 잡았다.
현재 위스키 시장은 싱글 몰트 위스키의 부상과 다양한 캐스크 도입 등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발렌타인은 기존의 명성을 유지하는 한편, 변화하는 소비자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포트폴리오 확장에 나서고 있다.
핵심 몰트 증류소인 글렌버기, 밀튼더프, 글렌토커스의 15년 싱글 몰트 시리즈를 출시하며 브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싱글 몰트 라인을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전통적인 숙성 연산에 얽매이지 않는 실험적인 제품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다.
또한 버번 캐스크 피니시를 적용한 발렌타인 7년 아메리칸 배럴, 라임 풍미를 강조한 발렌타인 브라질 등은 젊은 세대의 하이볼과 플레이버 위스키 트렌드에 대응하며 브랜드의 접근성을 넓히고 있다.
최근에는 희소성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발렌타인 40년(Ballantine's 40 Year Old)까지 출시되며 고급 위스키 시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발렌타인은 앞으로도 위스키 시장의 헤게모니를 잡아갈 수 있을 것인가? 다양성을 통해 또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는 발렌타인. 앞으로의 미래에도 얼마나 많은 통찰력이 있는지가 또 다른 발렌타인의 관전 포인트다.
written by 명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