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시간(2025), 그 시간에 남겨진 사람들

없앨 수도, 멈출 수도, 넘길 수도 없는

by 슴도치

이 드라마는 주인공 제이미 밀러(오언 쿠퍼)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년의 시간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시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주인공 제이미 밀러의 서사는 가장 적은 분량만 할당된다. 그는 이미 그 시간을 통과했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 분석, 결과라는 세 개의 축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은 소년의 시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조사관 : 루크 베스컴(루크 배스컴(애슐리 월터스)

루크 배스컴은 소년의 시간을 ‘조사’하는 인물이다. 그는 증거를 가지고 절차대로 움직인다. 소년의 체포 과정이 집요하게 분절되어 제시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는 ‘소년이 체포되는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벽에 파자마 차림으로 경찰서에 들어와 있는 '시간을 직접 체험' 하게 된다. 루크는 제이미를 체포하기 위한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살해 동기를 찾기 위해 자신이 다니는 아들의 학교로 찾아가 수사를 이어 나간다. 그곳에서 그는 평소 관계에 문제를 겪고 있는 아들과 마주한다. 사실 그는 제이미의 살해 동기에 관심이 있던 게 아니라, 제이미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아들의 동기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도움을 주어야 되는 존재인 줄 알았던 아들에게 도움을 받고 학교의 실태와 관계의 돌파구를 찾는다. 루크는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에 도달할 확률이 높은 인물이다. 그는 소년의 시간을 내면화하지도, 비극을 자신의 감정으로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그는 객관적 진실을 모으고, 분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삶에 정확히 배치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것들로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다. 소년의 시간을 통해 루크는 자신과 아들을 위한 시간을 얻는다.

분석관 : 브라이어니 애리스턴(에린 도허티)

브라이어니 애리스턴(에린 도허티)은 소년의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이 실패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제이미를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심리 분석가보다 더 자주 상담하고, 제이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코코아를 만들어준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가까워지는 것이 치료와 분석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시도는 소년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아니라 소년에게 끌려다니는 결과를 만든다. 감정에 동화되고 오히려 제이미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 처음 브라이어니는 제이미의 맞은편에 앉는다. 전형적인 심리 분석가처럼 의도를 숨기고, 심리를 객관화하려 한다. 그러나 실패하고 제이미에게 그 의도를 간파당한다. 이후 그녀는 대각선으로, 그리고 제이미의 바로 옆으로 이동한다. 분석의 위치에서 벗어나 소년의 감정에 맞서고 받아들이는 자리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제이미는 스스로 자신의 비밀을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해요.” 제이미가 반복하는 그 말이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 고백은 제이미의 시간이 어째서 그런 식으로 흘러왔는지 설명한다. 제이미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거절당하는데 익숙했. 운동을 못한다고 외면하는 아빠와 매력이 없다고 비웃는 여자아이 앞에서 그는 단순히 자신이 못 생겼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한다고 믿는다. 소년은 기계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피해자를 나쁜 년이라고 매도한다. 또한 살인 후 피해자의 몸을 만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며 자신을 양심 있는 인물로 묘사한다. 브라이어니는 그 순간 더 이상 분석과 치료의 의미를 포기한다.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이 이 시간을 오해해 왔다는 것을. 제이미가 원했던 것은 교화나 회복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과 관심이었다는 것을. 브라이어니는 본래의 뜻대로 소년의 동기와 과정은 파악했지만, 치료자로서는 실패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지식과 분석으로는 제이미가 갈망하는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간은 소년의 시간으로 인해 미완으로 남는다.

소년의 시간 : 에디 밀러(스티븐 그레이엄)

에디 밀러는 소년의 시간 이후에 남겨진 인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온몸으로 버티는 사람이다. 그는 소년의 시간이 가져온 것을 함께 시작했고, 그 과정에 있었고, 앞으로도 시간에 함몰될 인물이다. 그는 계속해서 후회한다.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가정은 에디와 가족을 더욱 괴롭게 만든다. 그러나 시간은 연속성의 산물이고 에디의 가정은 가정으로만 존재한다. 그는 소년의 시간을 계속해서 겪어낸다. 생일날 아침 자신의 트럭에 강간범이라고 낙서한 문구를 마주해야 하고, 트럭에 적힌 낙서를 지우기 위해 페인트를 사러 가야 한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아들이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시간을 견뎌낸다. 눈물이 날 만큼 괴롭고 후회로 가득한 날들이지만,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소년의 시간은 소년만의 시간이 아니라 가족과 자신에게 포함된 시간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도망치고 모르는 척해도 시간은 지나갈 뿐 사라지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인상적인 이유는 시간을 원테이크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특히 1화 경찰서에서의 장면은 소년의 시간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카메라는 소년에게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둘러싼 일과 사람을 따라 이동한다. 그리고 타인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 역설적으로 소년의 심리 상태와 상황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될 점은 카메라가 방을 나가는 사람 위주로 따라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시간은 고이지 않고 흘러가며 소년의 시간이라는 특정 시간 속에서도 방에서 나가는 사람에게 또 다른 시간이 부여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야기는 뚝심 있게 인간의 내면이 아니라 시간의 표면을 따라 움직인다. 이 드라마는 서사를 과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제이미가 체포되는 초반 시퀀스를 제외하고 소란스러운 지점도 별로 없다. 카메라는 담담히 경찰서에서 구금되는 순간, 학교의 작은 소동, 상담의 시간, 페인트를 사러 가며 떠드는 기억을 따라갈 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란스러워 봤자 시간이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을 감내할 뿐이다. 원하는 시간을 선택할 수 없지만, 주어진 시간에 대한 나의 행동은 선택할 수 있다. 소년의 시간이 남긴 세계를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없앨 수도, 멈출 수도, 넘길 수도 없는 ‘소년의 시간’이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