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
이 영화의 주인공 만수(이병헌)는 결핍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채 시작한다. 가정, 직업, 사회적 위치. 만수는 완성되어 가는 인물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던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무너지는 방식 또한 극적이지 않다. 나무가 잘리듯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것은 비극이라기보다 구조다. 이 영화에서 삶은 언제나 “어쩔 수가 없다”는 논리로 설명된다.
손바닥의 단어, 외주화 된 확신
만수는 중요한 말을 해야 할 때마다 손바닥에 문장을 적는다. 그것은 기억을 돕기 위한 메모가 아니다. 자기 확신의 외주화다. 그는 위기 앞에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인물이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는 심리를 붙잡기 위해 시각적 보조물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자신에게 말을 되뇌는 장면 역시 같다. 그는 내부의 확신을 외부에서 조달한다. 이 반복은 만수의 내면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보여준다. 그리고 퇴직으로 인해 그 승인의 부재를 경험한다. 그것은 곧 삶에 대한 부정이고 실직이란 단순히 밥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그가 존재할 수 있는 외부 장치의 파괴를 의미한다. 그는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손바닥 단어에 의존하고 그 단어조차 타인이 쓴 대본처럼 읽힌다. 만수에게 자아란 공백이고 그 공백은 시스템이 채워주던 것이다.
나무를 사랑한 나무꾼
아이러니하게도 만수는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분재와 원예를 즐기는 취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의 생업은 종이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야 한다. 그 모순은 영화의 중심 메타포가 된다. 사랑하는 것과 베어내야 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삶. 그는 생업 앞에서 냉정하고 잔인해진다. 그것 또한 어쩔 수가 없다. 만수의 분재는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는 가지를 치고 철사로 지지대를 만든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크기로 자랄 수 있게 유도한다. 그의 첫 살인의 결과물을 전기톱으로 자르지 못하고 분재하고 땅에 심으려고 한 것은 살인 또한 자신의 의지대로 설계하고 결론지으려는 만수의 본능이다. 그는 회사에서 베어지고 집에서 생명을 가꾸고 파묻은 것들 위에 사과나무를 심는다. 그에게 있어 식물과 분재는 결국 통제를 인정하고 갈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늘 폭력을 수반한다.
거울 속의 세 사람
범모(이성민)와 시조(차승원)는 만수의 거울이다. 그들 역시 평생 종이를 위해 살아왔고,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인물들이다. 다른 자리에 놓이면 어색하고, 다른 삶을 상상할 능력조차 없다. 그들은 종이가 되기 위해 베어져야 하는 나무들이다. 만수는 그들을 동정하고 동일시한다. 범모의 말을 그대로 가져와 미리(손예진)에게 자신의 말인 양 떠들고 처음 본 시조에게 현재 자신의 상황과 내밀한 이야기를 고백한다. 그는 그들의 실직이 존재의 삭제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한정되어 있고 돌아갈 자리를 지키기 위해 결국 그들을 먼저 베어낸다. 죽은 베트콩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 든 그의 아버지처럼. 굳은 손가락을 억지로 분재하고 자신의 삶을 먼저 통제한다. 영화를 보며 이 셋이 함께 의기투합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작은 회사를 차리고 종이를 만들고 같은 종의 나무들처럼 군락을 이루어 살았다면?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대한 회사의 일부가 되는 것만이 그들이 배워온 생존의 방식이고, 삶의 의미였다. 그들에게 회사 밖의 삶이란 상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스스로 숲을 떠나는 일과 같다.
폭력은 정당화의 도구
영화 후반, 만수와 선출의 대화는 결정적이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꼭 폭력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렇다면 더 이전에도 평화롭고 지혜로운 선택지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는 너무 많은 나무를 베어왔다. 만수는 선출을 “어쩔 수 없이” 베어낸다. 앞서 저지른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 영화에서 폭력은 선택이 아니라 정당화의 도구다. 만수의 폭력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정당화된다. 만수의 논리대로라면 범모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고, 시조의 죽음은 불가피했고, 선출을 죽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폭력이 먼저 일어나고 이유는 나중에 붙는다. 먼저 베어내지 않으면 내가 베어지는 세계. 그 모든 과정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윤리적 검증 없이 통과된다.
미리, 견디는 사람
만수는 영화 초반, 타인의 생계를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고 손바닥에 단어를 써가며 싸우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의 위기 앞에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미리는 남편의 악행을 알면서도 모른 척 살아간다. 땅을 파내고 진실을 알게 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녀는 영화 내내 진실 앞에서 무력하다. 아니 어떤 진실이든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라면 버텨낸다. 그녀는 남편을 안고 1분을 세어야 할 만큼 견디기 힘들어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세계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감내할 뿐이다.
그녀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베어지지도, 분재를 당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만수에게 있어 그토록 사랑했던 나무 그 자체다. 만수는 미리의 행동에 의심하고 분노하지만 결코 끝까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베어내야 했던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미리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남편의 폭력과 거짓말, 살인을 견뎌낸다. 59초부터 세다가 만수에 의해 1초부터 다시 세는 장면. 미리는 끝에서부터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만수에게 지금까지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견딜 수 없는 사람을 견딜 수 있는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 그 모든 폭력과 살인의 순간보다 가장 잔인했던 장면. 미리에게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의 의미는 만수와 다르다. 만수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시작하지만, 미리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체념한다.
손바닥이 깨끗해진 날
만수는 모든 일이 끝나갈 때 앓던 충치를 스스로 뽑아낸다. 그는 더 이상 손바닥에 글자를 적지 않는다. 만수에게 남은 건 기형적인 자기 확신이다. 그는 드디어 모든 것이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는 세계관을 획득했다. 인원 감축에 예민했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그는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야 한다고 외친다. 그에게 중요한 건 타인이 아니라 자신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베어낼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도덕과 상식이 상실된 자리에서 그는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다. 손바닥이 깨끗해졌다는 의미는 그가 더 이상 외부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공장에서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모든 것은 만수에게 당연하고 단순한 일이 되었다. 그는 숲에 홀로 남은 나무고 이제 할 일은 자신과 똑같은 나무의 시체를 넘어 기계적으로 종이를 만드는 일이다. 텅 빈 종이의 공장 안에서 그는 더없이 행복하다.
과잉과 결핍의 문제
영화는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계급, 자본, 가족, 폭력, 정당화, 구조. 주제는 훌륭하지만 모든 것을 집약하려는 욕심 탓에 메타포는 과잉되고, 인물은 과밀해진다. 러닝타임 역시 좀 길다. 영화는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이제 커튼콜을 기다리는 관객에게 2부의 시작을 알린다.
아라(염혜란)라는 인물은 연기에 비해 서사가 빈약하다. 그녀에게는 범모를 살해해야 할 필연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는다. 만수를 공격하던 그녀가 갑자기 범모를 향해 총을 쏠 때 관객들은 의아하다. 처음 본 만수가 뱀에 물리자 입으로 독을 빼내어 준 것도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들 에피소드 역시 만수의 경제적 압박을 설명하는 선에서 멈췄다면 더 날카로웠을 것이다. 차라리 오진호(유연석), 이원노(김형묵)와 미리의 관계를 좀 더 입체적으로 끌고 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 둘 중의 한 명, 혹은 둘과의 관계를 이용하는 에피소드를 한두 장면 넣었다면 생존을 위해 만수의 죄를 모른 척하고 버텨내는 미리라는 캐릭터가 한결 선명해졌을 것이다.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사실 가장 폭력적인 문장이다. 그 말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타인의 고통과 부재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만수는 나무가 되고 싶었지만 나무꾼이 되었고, 주변의 나무를 모두 베어낸 뒤 홀로 남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말하는 세계에서, 모든 것은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어쩔 수 없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쩔 수 없는 이유에 의해 부정당하고 사라지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그 말에 담긴 위계와 강압, 숨은 선택, 회피되는 책임에 대해. 만수는 끝까지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 말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정말 "어쩔 수가 없다(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