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차오르는 심해의 구원
향유고래는 체중의 3%를 매일 먹어야 한다. 거대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먹이를 찾아 헤맨다. 영화 ‘더 웨일’은 제목 그대로 거대하고 축축하며, 끝없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한 사내의 기록이다. 찰리(브렌든 프레이저)는 고래다. 272킬로그램의 몸. 그는 끝없이 자신을 채운다. 음식으로, 죄책감으로, 자기 파괴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래가 시신 곁을 떠나지 못하듯, 찰리는 죽은 연인 앨런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는 앨런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그 실패를 견디기 위해 자신에게 형벌을 내린다. 매일 체중의 3%씩, 끝없이 채워 넣는 것. 마음의 구멍은 결코 메워지지 않는데 몸은 계속 불어난다.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고래는 감정이 없다. 그저 거대한 생명체일 뿐이다. 그것을 악한 짐승으로 만드는 건 에이헤브의 집착이다. 찰리 역시 자신을 모비딕으로 만든다. 죽여야 할 짐승으로. 하지만 그의 육신과 사랑에는 아무 죄가 없다. 없는 죄를 만드는 건 찰리 자신이다. 그는 허상의 고래를 추적하고 사냥하며 무거워진 몸과 함께 가라앉는다.
찰리는 영화 내내 "솔직함"을 이야기한다. 학생들에게, 엘리에게, 토마스에게. 왜냐하면 자신이야말로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카메라를 끄고 원격으로 강의를 하고 연인의 죽음을 직면하지 못한다. 솔직함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슬픔에는 솔직하지 못했다. 그가 말한 솔직함은 뒤늦게 깨달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며 타인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리고 홀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죽은 고래는 서서히 낙하할 뿐이다.
고래낙하란 거대한 고래가 죽어 심해로 가라앉는 현상이다. 그 시체는 많은 영양분을 품고 있고, 심해 생태계를 변화시킨다. 찰리는 천천히 가라앉는 고래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에게 달라붙은 생명체들이 있다.
토마스(타이 심틴스)는 빨판상어(Remoras)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찰리라는 거대한 숙주를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찰리를 통해 증명하고 싶어 한다. 토마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다. 혼자서는 삶의 방향(이동)을 선택할 수도 없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구원을 타인에게 미룬다. 그는 신과 가족에 대해 말하지만 그의 내면은 그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는 정작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엘리가 만들어준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기뻐한다.
과거 자신의 잘못을 찰리의 구원을 통해 보상받고 싶어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 인물이다. 토마스는 교회의 돈봉투를 가지고 도망치고 찰리가 내어준 성경을 가지고 또다시 달아난다. 찰리는 자신의 비대한 몸을 이용해 토마스의 솔직함을 이끌어낸다. 역겨운 것을 역겹다고 말할 수 있게 도와주고, 그 솔직함과 성경을 가지고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찰리는 토마스가 자신과는 다르게 살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설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는 찰리가 토마스를 종교적으로 구원한다.
리즈(홍 차우)는 고래이(Whale Lice)다. 대형 어류의 몸에 붙은 기생충을 먹어 치우며 그들을 관리한다. 그녀는 찰리의 몸 곳곳에 묻어 있는 오빠 앨런에 대한 행복과 사랑의 기억을 먹는다. 고래이는 고래의 몸을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는다. 리즈 역시 찰리의 곁을 떠날 수 없다. 그녀는 찰리가 죽으면 앨런과 연결된 마지막 끈이 끊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찰리의 비대한 살결(피부) 속에 자신의 삶을 파묻어버린 존재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찰리를 보살피고 구원하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도움일 뿐이다. 그녀는 찰리의 내면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덜 사랑해서도, 자격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녀의 사랑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래이가 고래의 죽은 피부와 손상된 조직을 먹고 살 듯 리즈는 찰리의 썩어가는 몸을 닦아주고 폭식을 만류하면서도 음식을 가져다준다. 찰리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면 리즈는 파괴적인 헌신을 하는 셈이다. 고래이는 고래의 피부 위에서만 활동할 뿐 고래의 거대한 심장에는 들어갈 수 없다. 리즈는 찰리의 혈압을 재고 울혈성 심부전증을 관리하며 육체적 생명을 연장한다. 하지만 찰리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에 그의 죽음을 아래층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찰리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다. 그녀는 찰리의 낙하를 인정하고 돕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본질적으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녀는 솔직하게 슬픔과 마주하고 그들의 죽음을 통해 자유로워질 것이다.
엘리(세이디 싱크)는 상자해파리(Box Jellyfish)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을 가진 상자해파리처럼 그녀는 만나는 모든 이에게 마비될 정도의 독설을 내뱉는다. 그녀는 타인의 약점을 정확히 찌르고 상대가 독에 반응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사악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상처받기 전에 상대를 먼저 마비시키는 생존 본능일 뿐이다. 해파리의 몸이 투명하여 속이 다 보이듯, 엘리의 악의는 사실 자신의 내면을 들키지 않으려는 투명한 방어기제에 가깝다. 그 투명함 속에는 처리되지 못한 거대한 상실감과 분노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녀는 누구보다 찰리를 사랑했고 그가 자신을 고래로 만들고 괴롭히고 사냥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해파리는 눈이 없지만 세상을 감각하듯, 엘리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본능적인 진실의 촉수로 위선의 가죽을 찢어발긴다. 그렇기 때문에 찰리에 대한 엘리의 증오는 사실 사랑에 가깝다.
해파리의 몸은 대부분 물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연약하다. 엘리 역시 맹독 같은 말을 쏟아내지만, 그 본질은 보호받지 못한 채 버려졌던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누구보다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연약한 영혼이다. 찰리는 엘리의 독설이 악의를 가장한 솔직함이라는 사실을 꿰뚫는다. 그는 엘리에게서 자신의 구원을 본다. 엘리야말로 찰리가 바라는 구원의 최종 형태다. 그리고 그녀가 토마스를 집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줬을 때, 찰리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비로소 믿게 된다.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없으며, 누군가를 돕고 변화시키는 놀라운 존재라는 사실을. 엘리는 찰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증거다.
찰리는 서서히 가라앉지만, 찰리로 인해 다른 생명체들은 구원받는다. 토마스는 엘리를 통해, 엘리는 찰리를 통해, 리즈는 찰리를 보내며. 이 영화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돕고, 실패하고, 끝끝내 구원하게 만드는 영화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곁에 있는 생명체들이 노력해도, 결국 자기 자신의 구원은 자신의 결정으로만 내려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찰리와 리즈는 앨런을 살리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리즈와 엘리는 찰리에게 실패한다. 토마스는 찰리를 구원하려 했지만 도리어 구원받고, 엘리는 아버지를 거부했지만 결국 그를 이해한다. 찰리가 마지막 순간 일어서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선택이다. 엘리가 읽어주는 ‘모비딕’ 에세이를 들으며, 그는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앨런을 사랑했다는 것, 엘리를 사랑한다는 것,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 그 순간 그는 고래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마지막 장면, 찰리는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것이 죽음인지 구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걸었다는 것, 일어섰다는 것, 스스로를 용서했다는 것이다. 고래낙하는 끝났고, 고래는 비상한다. 브렌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이 모든 것을 말없이 보여준다. 272킬로그램의 특수 분장 아래, 그는 고래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래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래가 가라앉다가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그가 힘든 과거를 딛고 일어섰듯이 말이다. 좋은 이야기란 이런 순간, 누군가를 변화시킬 힘을 얻는다.
이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답은 "아니다"이면서 동시에 "그렇다"이다. 우리는 타인을 직접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존재, 우리의 사랑, 우리의 솔직함은 그들이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돕는다. 찰리가 엘리에게 그랬듯이. 엘리가 찰리에게 그랬듯이.
고래는 가라앉았다. 그리고 비상했다. 물결이 튀어 오른다. 더 높게 가라앉는 영화 ‘더 웨일(2022)’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