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니아(2025),소의 시체에서 태어난 벌

사라지는 벌들

by 슴도치


4세기 그리스의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화성으로 이주가 현실이 되려는 요즘도 지평설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주장의 가장 큰 기반은 우리가 배운 과학은 조작되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단순한 지리적 가설이 아니라 현재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다.


이 영화에서 월식은 반복된다. 그리고 매번 지구의 모습은 달라진다. 둥글게 보였다가, 왜곡되었다가, 결국 평평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세계의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가장 허무맹랑한 가설과 철저한 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NASA를 믿지 않는 남자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나사를 믿지 않는다. 그는 거대한 배후 세력에게 세뇌당하지 않겠다고 외친다. 하지만 그는 매일 자신의 알고리즘을 통해 세뇌된다. 그는 음모론자지만 단순한 광신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불행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병, 회사, 사회 구조, 실패. 그는 그것을 구조적 음모로 재배치한다. 왜냐하면 음모는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설명된 고통은 보다 견디기 쉽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아이러니는 여기 있다. 진실을 의심하는 자가 가장 쉽게 취사선택한 다른 진실에 현혹된다는 것. 그가 하는 짓은 사이버 렉카 유튜버와 다를 게 없다. 그는 타인의 공포, 의혹, 불안을 긁어모아 자신만의 이론을 만든다. 이론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조회수, 조회수는 돈(에이든 벨비스)이라는 구독자를 만든다. 그의 채널은 진실을 파헤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파헤치는 건 자신의 불안이다. 테디는 진실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의심을 소비하는 사람이다.




믿음을 사랑한 구독자


돈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구독 버튼을 누를 뿐이다. 음모를 믿는 사람도,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사실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는 제시되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학대당한다. 테디의 세계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작은 공동체에서 받는 관심의 체류 시간이며, 공통된 믿음의 소속감이다.


돈은 얼핏 피해자처럼 보인다. 음모론자와 자본가 사이에 낀 소시민. 하지만 돈은 이 영화에서 미셸(엠마스톤)과 테디의 관계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테디의 유일한 조력자이며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게 도와준 원동력이다. 그는 음모론의 희생양이지만 사실 테디의 음모는 그의 존재로 인해 유지된다.


돈이 미셸에 의해 현실로 돌아온 순간, 그는 주입된 현실과 망상을 벗어나고 싶다. 그 내면에는 공백이 생긴다. 그는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거듭된 거짓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찾고 싶지만, 그런 곳은 지구에 없다. 그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설계된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로 떠난다. 그 또한 알고리즘에 중독된 가장 자극적인 길이다.




진실의 관리자


미셸은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CEO, 성공, 영향력.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인물이 아니라 소비되는 콘텐츠다. 테디가 공격해야 할 대상, 분노를 생산하기 위한 재료, 구독자를 유지하기 위한 적. 미셸은 테디의 주장을 처음엔 부정한다. 경청하는 척한다. 이해하는 척한다. 하지만 그녀의 목적은 현재의 상황을 조율하는 데 있다.


그는 음모론을 부정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유통되는 구조 위에 서 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논란의 근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판을 만들고 그 판을 관리하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테디를 적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테디가 생산하는 불안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테디의 존재야말로 미셸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테디가 있음으로 미셸의 성공은 이유와 목적을 갖는다.


미셸이 무서운 이유는 거짓말에 있는 게 아니라 절반의 진실만 말하는 데 있다. 절반의 진실은 완전한 거짓보다 반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음모를 생산하는 자들의 그 망설임을 판을 만드는 관리자들은 선호한다. 윙윙거리며 방향 없이 날아다니는 벌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테디가 틀렸다고 해서 미셸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그 불편한 등호를 끝까지 유지한다.



음모론과 진실의 공허


부고니아. 고대 그리스인들은 소의 시체에서 벌이 태어난다고 믿었다. 우리는 그 믿음이 틀렸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벌이 사라지는 이유를 아는 것도 아니다. 살충제나 기상이변? 모두 가설일 뿐이다. 그 설명되지 않는 것 위에 또 다른 배후 세력과 권력자들을 조미료처럼 섞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본다. 열광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은 여전히 사라진다.


이 영화가 끔찍한 이유는 지구를 지킬 마지막 희망이 형편없는 음모론자라는 데 있다. 진실은 불확실하고, 거짓은 늘 확신에 차 있다. 사람들은 진실을 위해 싸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 사이 지구는 꼼짝없이 소모된다. 이 영화는 그 악다구니 사이에 사라지고 있는 것을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끝까지 무엇이 의해 조종되었는지 무엇에 의해 끝나게 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벌이 사라지는 것처럼 인간도 어느새 사라져 있을 수 있다. ‘부고니아’는 음모론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세상을 말하는 영화다. 평평한 지구를 믿는 것과 NASA를 믿는 것의 진실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치열하게 싸울 이유가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벌은 소의 시체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실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건 아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