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위크 Projektwochen

19/20 겨울학기 워밍업

by 숨김

* 결국 학기가 끝난 후에야 쓰는 밀린 지난 학기 기록.


지난 2주 간의 프로젝트위크, Projektwochen이 끝나고 드디어 겨울학기의 정규수업 Lehrveranstaltung이 시작되었다. 학교마다 또는 전공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학교에서 Projektwochen은 학생들이 정규수업 전에 자유롭게 선택해서 듣는 워크샵같은 개념으로 성적이 매겨지는 것이 아니기에 (학사는 어떤지 모르겠다) 다소 널널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석사학생들이 진행하는 워크샵도 있어서 수업을 직접 진행해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물론 다수의 석사학생들은, 특히 이 학교에서 학부과정을 졸업한 학생들은 아예 이 과정을 스킵하고 2주 동안 다른 활동을 더 즐기는 경우도 많아 보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정규수업 전에 나름 긴장도 풀고 학업 분위기가 어떤지, 학생들은 어떤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매력적인 커리큘럼이 거의 4-5개는 되어서 하나만 선택하기가 힘들었지만, 초반부터 너무 힘을 들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Re-think Paper>, 종이 리사이클링에 관한 프로젝트로, 마지막에 최종 결과물로 종이를 재활용한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것이 목표였다. 뭔가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보다는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해보고 싶어 선택했다.


프로젝트 첫날 학교에 가면서 긴장감과 함께 두근거리던 마음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첫 수업은 화요일이었다. 석사학생인 S와 졸업한 학교 동문인 P가 튜터로서 진행한 이 프로젝트의 모든 과정은 (당연하게도)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터질 것 같던 나의 마음이 무색하게도 워크스페이스(학과홈페이지)에 15명의 학생들이 등록되어있던 것과는 달리 첫날부터 총 5명의 학생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이튿날부터 또 한 명이 줄어 튜터 2명과 학생 4명이 참여하는 매우 소규모의 워크샵이 되었다. 첫날 교실에 들어갔을 때 네 명의 여학생과 한 명의 남학생이 서로 재잘재잘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S와 P는 화이트보드 앞에서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유일한 아시아인인 내가 들어가자 다들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 조용히 앉아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데 (역시 당연하겠지만) 너무나도 빠른 독일어로 후루룩뚝딱 얘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편하게 (하지만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알아들으려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자 다들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고, 그때까지 왠지 불안한 눈빛이던 튜터들은 내가 독일어로 내 소개를 하자 왠지 안심하는 얼굴로 바뀌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갑자기 앞에 앉아있던 여학생들 중 한 명, Y가 갑자기 어, 안녕! 하고 한국어를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도 놀라고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왠지 분위기가 더욱 편하게 다가오면서 안심이 되었다. 마치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서서히 따뜻하게 데워진 느낌이랄까. 약 2년전 한국에서 6개월간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었던 Y는 제품디자인과 학부생이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가지의 (중요한)단어들을 알고 있었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 다시 꼭 가보고 싶노라고 했다. 학교 생활에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며 연락처를 교환했다. 프로젝트 수업을 듣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 첫 순간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마주치면 언제나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첫날의 수업은 형태와 질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먼저 각자 두 사람씩 뒤돌아 앉아 한 사람이 S가 준비해온 작은 오브제를 박스 안에서 눈으로 보지 않고 오직 손으로만 만지며 형태에 대해 묘사하면,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들으면서 종이에 스케치를 해보는 것이었다. 오브제의 형태는 매우 다양해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즐거웠다. 모두들 진지하게, 때로는 킥킥거리며 단어로 묘사하고 스케치로 그렸고, 후에 그려진 스케치와 실제 오브제를 꺼내 비교해보았는데 어딘가는 비슷하면서도 어느 한 곳에서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면 그 부분은 완전히 달라져버려 다소 기괴한 형태가 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리 언어가 통해도 시각적으로 같은 것을 함께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예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심지어 독일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다 특히 조형과 묘사에 대한 단어를 많이 알지 못했던 나조차도 매우 간단한 단어들(구, 사면체, 오른쪽, 아래 등)로 대강은 비슷한 물체를 그려낼 수 있어 새삼 신기했다.

쉬는 시간 후에는 현재 우리 주변에 있는 종이로 만들어진 제품들에 대해 각자 생각해보고 포스트잇에 빠르게 스케치해보는 시간을 가졌고, 각자의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종이컵, 책, 노트, 종이봉투, 포장지,... 그린 것을 다같이 붙여놓고보니 다들 생각하는 것이 왠지 비슷했다. 그 중 삶에서 필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스티커를 붙여 표시하고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다음 날은 종이라는 소재에 대해 각자 키워드를 뽑아와서 마인드맵을 만들었다. 종이의 컬러와 재질, 형태, 그리고 성질,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의 가능성 등 다양한 키워드를 도출한 후 Aufgaben 주제가 주어졌다.


- 8개의 사과를 무한정의 거리로 이동할 수 있는 패키지를 디자인하시오.

종이와 다른 재료를 결합해 기존의 연결방식을 새롭게 바꾸거나 종이를 활용한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시오.


우리는 30분 정도 각자 검색+리서치타임을 가진 후, S가 준 포스트잇에 10초간 하나의 아이디어를 크로키로 표현해 총 10개의 아이디어까지 각자 뽑아내었다. 그리고 각자 그 아이디어들 중 하나를 발전시켜 금요일에 튜터들의 스튜디오에서 만나 컨펌을 받기로 했다.

튜터들의 스튜디오는 템펠호퍼펠드 근처에 있었다. 전면 유리창으로 된 스튜디오는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지금까지 그들이 만들었던 제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쇼룸같아보이기도 했다. 안에 들어가자 S가 반갑게 맞아주며 커피를 내려주었다.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P도 머리에 3M마스크를 올려쓴 채로 나와 인사를 했다. 나는 전날까지 생각하던 아이디어들 중 2가지를 골라 간단하게 페이퍼 모델로 만든 후 가져가서 컨펌을 받았다. 스케치를 한 것과 페이퍼모델을 보여주며 어눌한 독일어로 설명을 하자, 튜터들은 진지하게 들어주고는 여러가지 피드백을 주고, 최종적으로 내가 진행하길 원하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라는 조언을 주었다. 확실히 여러 명이 있을 때 이야기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하니 독일어가 더 잘 들렸다.


4일간의 프로젝트 수업 후 그 다음 주 중반까지는 각자 형태를 제작하는데 몰두했다. 목요일이 최종 프레젠테이션이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형태를 완성해야했다. 나는 오랜만에 거의 꼬박 밤을 새서 형태를 만들었다. 감기기운이 있어 약을 먹고 S반을 탔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종점인 포츠담역에 도착해 트램을 갈아타고는 학교 앞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구름 위를 떠가는 기분이었다. 과연 내가 이 상태로 뭔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들 어떤 것을 만들어왔을까. 내가 만든 것이 제일 후지면 어쩌지?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다)

프로젝트 라움에 들어가 다들 만들어온 결과물들을 보니 다들 자기만의 아이디어로 다양하게 만들어온 것이 보였다. 종이를 접는 방식을 이용했거나, 종이와 실을 연결해 망처럼 만들었거나, 종이로 조끼를 만들어 종이봉투 주머니에 사과를 넣어온 학생도 있었다. 나는 다른 재료없이 오직 종이만을 사용해서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박스종이를 활용해 구조물을 끼워 조립하는 방식의 패키지를 만들었다. 다들 자기만의 결과물에 사과를 넣어 옮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사용한 재료와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모두의 아이디어가 흥미로웠다.

모든 프로젝트 수업이 끝나고 Y와 함께 학교 까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서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가 학과 사무실에서 작업실 Werkstatt 열쇠를 받는 것을 도와주었고, 학교시스템에 대한 정보들을 알려주며 나중에 Werkstatt을 이용하는 방법도 알려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첫단추를 정말 잘 끼운 기분이 들었다. 입학식 날 P를 만났던 것처럼!


프로젝트 위크가 끝난 뒤 금요일에는 오전부터 오후까지 강당에서 각 전공별로 이번 정규학기 수업을 소개하는 행사 Semesterthemen Vorstellung이 있었다. 과별로 교수님들이 각자 진행하시는 수업에 대해 설명하시고 학생들이 직접 질문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군데군데 입학식날 만났던 석사학생들을 포함해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이날까지 수강신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소개를 듣고 수강할 수업을 결정하는 사람도 많아보였다. 역시 모든 과정은 독일어로 진행되었고, 나는 빔 프로젝터의 화면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독일어들을 알아들으려 노력했다. 흥미로운 수업들이 많아서 시간표를 짜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인기있는 수업을 들으려면 빠르게 신청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딜가나 피터지는 수강신청...) 시간이 많지 않아 머리 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나는 넘나 운좋게도 원래 듣고자 했던 수업들을 수강할 수 있었다. 석사 특권인가... 제발 다음학기에도 그럴 수 있길!) 행사가 끝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튜터 S를 다시 마주쳤다. 눈으로 인사를 하던 그는 다가와 언제 한번 따로 만나서 석사연구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했다. 왜냐면 스튜디오에서 컨펌받던 날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의 석사주제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못 만났다는 것이 함정... 뭐 언젠간 얘기할 수 있겠지)

아무튼 이렇게 학기는 시작되었고, 다음 글에서는 들었던 수업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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