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배 타고 입학식은 처음이지?
생각보다는 순조로웠던 시작의 하루였다. 물론 공사 때문에 기차가 다니지 않아 S반으로 더 오래가야 했는 데다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는 것 빼고는. 오늘만큼은 정말 비가 오지 않길 간절히 바랬는데 아침 7시에 울리는 알람에 눈을 떠보니 밤새 내리던 비가 여전히 오고 있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오트밀과 복숭아를 먹어치운 뒤, 가방을 챙겨 8시에 집을 나섰다. 출근시간이라 S반은 무표정하게 서두르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지만, Friedrichstraße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려서 가까스로 앉을 수 있었다. 거의 40분은 타고 가야 했기 때문에 자리가 나면 무조건 앉아야 했다. 앉아서 눈을 감고 팟캐스트를 듣다 살짝 선잠이 들었다.
S7의 종착역인 포츠담 중앙역에 내려 다시 트램을 탔다. 입학식은 Hans-Otto-Theater라는 극장에서 진행되었는데, 행사가 끝나고 나면 바로 뒤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포츠담을 감싸고 있는 Havel강을 투어하는 코스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사실 유일하게 기대했던 코스이자 비가 오지 않길 바랬던 이유였는데, 다행히도 입학식이 끝날 때쯤 잠시 비가 그쳐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아주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입학식에는 (당연하겠지만) 석사보다 학사가 훨씬 많았고, 외국인은 더더욱 적은 것 같았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총장님의 말씀이 끝나고 학생회가 나와서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는 혜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소개의 마지막에 포츠담 학생은 NEXTBIKE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답니다, 하고 말하는 순간 왼쪽 무대에서 한 사람이 자전거를 찌릉찌릉하며 타고 나왔고,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다음 순서로 각각 다른 과의 교수님 두 분이 나와서 학교 수업을 어떻게 들으면 되는지 등의 안내를 하면서 호구조사 비슷한 것을 했는데, 교수님 중 한 분이 Information visualizaiton 전공이셔서 그런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최근에 Abi(독일의 대학수학능력시험)를 치른 사람, 또는 올해 학교를 졸업한 사람? 같은 질문이었는데 질문에 따라 해당되는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비율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놀라웠던 것이 포츠담에 사는 사람과 베를린에 사는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었는데 베를린에 사는 사람이 월등하게 많아서 다들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가까운 거리에 있고 포츠담은 상대적으로 소도시이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마지막 질문은 외국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극장 안에 거의 500명이 앉아있었다면 서 있는 사람은 30명도 안되어 보였다. 입학시험 요강에 외국인 지원자는 11%가 정원이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더 적어 보이는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극장 대표님이 나와서 극장 소개를 했고, 입학식을 위한 공연을 준비했다며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공연을 마지막으로 극장에서의 행사는 끝이 나고 밖에 나왔더니 학생회 임원들이 올해의 에코백을 나눠주고 있었다. 학교이름이 크게 박힌 것도 아니고 재질도 괜찮아 보여서 냉큼 받아들어 안을 살펴보니 음료수와 학생카드용 케이스, 노트, 그리고 각종 팜플렛과 Gutschein 쿠폰들이 들어있었다. 특이한 것은 캠퍼스 가든 팜플렛이었는데, 학교 내외의 정원에 있는 식물들을 돌보는 교내활동단체같은 건데 씨앗이 함께 들어있었던 것이다. 식물과 환경을 위한 지속가능한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출구에서 잠시 대기하다 준비된 배를 타고 투어를 시작했다.
배의 이름은 포츠담에 있는 유명한 궁전의 이름과 같은 Sanssouci 상수시 호였다. 내부에 들어가자 식당처럼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인 공간이 있었다. 나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2시간 동안 바깥구경이나 하자 싶어서 창가에 있는 2인용 테이블에 냉큼 자리를 차지했다. 학생들도 처음엔 다들 서먹서먹하게 자리에 앉더니, 이내 시끄럽게 수다들을 떨기 시작했다. 항해가 시작되고, 한동안 묵묵히 바깥을 보며 멀리 보이는 건물들과 규칙적으로 열을 맞춰 날아다니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포츠담에는 옛날부터 보존되어 왔던 오래된 건물들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는 베를린보다는 상대적으로 세계대전의 여파를 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포츠담 회담이 포츠담에서 열렸던 이유도, 원래는 베를린에서 하려고 했는데 베를린에 멀쩡한 건물이 남아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인근 도시인 포츠담에서 진행된 것이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창밖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안녕, 하고 말을 걸었다. 혹시 여기 앉아도 되니, 물어보길래 그러라고 했다. 털썩 앉아선 아는 사람 없니, 묻고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도 그래, 하며 씨익 웃었다.
만하임에서 온 P는 알고 보니 나와 같은 Design과의 학사전공이었다. 한국 사람과 이야기해 본 것은 온라임 게임(LOL)에서밖에 없었다는 다소 Nerd(실제로 본인 입으로 얘기함)같은 그는 만하임에서 파티와 음악을 즐기며 낮에는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밤에는 클럽에서 디제잉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왼쪽 귀의 청력을 거의 상실한 이후로는 그만뒀고, 계속 반복되는 일과 삶에 대한 고민 끝에 학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2시간 동안 가만히 있는 건 싫었는지 독일에는 언제 왔는지, 어디에 사는지, 한국에서는 어떤 공부를 했었는지부터 여가시간엔 뭘 하는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등의 질문을 계속해서 던졌고, 덕분에 잔뜩 긴장해있던 나는 그린티도 얻어마시고 긴장도 풀 수 있었다.
배에서 내려 학교로 돌아가는 트램을 타러 가는 길에는 비가 계속해서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트램도 안 와서 한참 기다리다가 타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거의 못 탈 뻔했다. 학교에 도착할 때쯤 춥고 배도 고팠으나 바로 디자인과 안내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뭔가 먹을 시간도 없이 Haus D에 있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크래커와 견과류가 놓인 접시가 있어서 급하게 몇 개 집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때까지도 이게 하루에 먹은 전부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알았으면 더 먹을 걸...
강당에는 Produkt, Interface, Kommunikation 디자인 전공의 학사, 석사 신입생, 그리고 교환학생 모두가 앉아있었다. 학교 시설 소개를 가장 먼저 했는데,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창문에 손을 넣지 말라는 픽토그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학교의 모든 건물의 창문이 automatisch한 시스템으로 열렸다 닫히기 때문에 손을 대면 위험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냥 위험하니까 건들지 마세요,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손을 넣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까지 소름끼치게 묘사해주는, 몇몇 학생들은 웃었지만 교수님은 완전 정색하며 이야기하는 매우 효과적인(?) 경고 방식이었다.
학교 내 시설과 커리큘럼, 디자인과 학생회 StuRa, Mensa 학생식당 그리고 Werkstatt 작업실 안내까지 마친 후 각 과 학생들을 그룹지어 교내투어를 해주는데 석사 그룹은 먼저 Fotoshooting을 하더니 다음 일정이 있는 17시까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석사 학생들 중에 이 곳에서 학사를 한 학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같은 석사 친구들을 모아 얘기했더니 홀 입구에서 이런저런 안내를 해줬다. 학사를 마치고 석사로 들어온 친구들이 Mensa 쪽에 있는 학생증을 Validation하는 기계 사용법을 알려줘서 드디어 학생증을 교통카드로 바꿀 수 있었고, 다 같이 학교 안에 있는 바 CASINO에 가서 음료수를 산 뒤,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인은 나뿐이어서 빠르게 오고 가는 독일어를 눈치껏 알아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17시가 되어 석사 과정 안내를 들으러 갔다. 왠지 이번에는 다른 년도보다 석사가 훨씬 적은 것 같았는데, 대만에서 온 한 학기만 듣는 교환학생을 포함해 모두 12명이었고, 그중 외국인은 나와 중국인 1명, 대만인 1명, 그리고 아직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폴란드에서 온 것 같은 사람 1명 이렇게 4명이었다. 오늘 행사에 안 온 사람도 있는 것 같다고 하니 얼추 15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각자 자기소개와 함께 Master Thema에 대해 이야기한 후 석사 코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는데, 아무리 봐도 1년은 너무 짧은 시간같이 느껴졌다. 몇몇 애들도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걸 보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래서들 보통 2년은 하는구나..
2일부터 17일까지는 Projektwochen 프로젝트 위크 기간으로, 정규 수업 전까지 학생들이 자유롭게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워크숍 형태의 수업이 있고, 이것은 연구를 진행 중인 석사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마스터 테마와 관련해 직접 수업을 진행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정규 수업은 거의 21일부터 시작되는 데다, 시작도 전에 힘을 빼고 싶지 않아서 거의 밤새 고민하다가 다음 주에 시작되는 프로젝트 한 개만 지원해 놓았다. 이것도 아마 미리 준비를 해놔야 직접 가서 들을 때 헤매지 않겠지... 그래도 학기 시작 전에 하도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놔서인지 생각보다 독일어에 대한 타격이 크지 않고, 함께 공부하게 될 친구들과 나름 안면도 텄고,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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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식 다음날에는 유학 온 신입생들을 위한 International Dinner가 있었는데, 각자 나라의 음식을 직접 만들어 와서 함께 나눠먹으며 교류하는 자리였다. 나는 고민 끝에 채식주의자도, 종교상의 이유로 고기를 안 먹는 사람도 문제없이 먹을 수 있는 잡채를 만들어갔다. 뭔가 거창해 보이는 이름과 달리 Mensa에서 진행된 행사에는 자리만 만들어 놨을 뿐 딱히 프로그램이 없었고, 정말 음식을 각 나라의 국기와 함께 뷔페처럼 늘어놓고 각자 그릇을 가져와 덜어가서 먹는 시스템이었다. 벌써 독일에 나와 산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이런 방식의Kennenlernen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어색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한국 국기가 이미 올라가 있었다. 건축 전공의 마스터 한국인 2명이 있었고, 그분들이 가져오신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며 우리는 한 테이블을 차지했다. 내가 만든 잡채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누군가 마지막까지 긁어먹었는지 당면 한 줄도 남지 않아서 정말 뿌듯했다. 곧이어 그들의 초대로 온 독일인 K, 그리고 처음 알게 된 우크라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D와 Y까지 합세했다. 카지노에서 맥주를 더 사온 우리는 각자의 전공 소개를 시작으로 음식, 문화에 대한 이해부터 크림반도, 난민, 네오나치까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다 기차 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함께 베를린으로 돌아오면서 Stattliche Museen Karte에 대해 들었는데 1년 동안 모든 전시를 볼 수 있는 카드가 50유로밖에 안 한다는 것이었다. 이걸 이제 알다니.. 작년에 간 전시가 몇 개인데ㅠ 역시 사람이 모이는 곳에 정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당장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씻고 누우면 바로 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1. 막상 누우니 잠이 안 오고, 2. 지금 남기지 않으면 이 기분과 기억이 금방 지나가버릴 것 같아서 얼른 남겨본다. 좀 길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쓰고 나니 다시 머리가 비워져 정리된 느낌이다. 내일부터 다음 주 수업 전까지는 독일어로 열심히 채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