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03 부르디외_취향의 계급

‘자연스러움’의 서열

by soominC

<철학적 고찰 Series 1_E01 – Prelude>


매력적인 사람을 볼 때면

그의 취향을 몰래 훔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훔친 그 매력을 내 안에 새기고,

그로써 내 것으로 빚어진 그 취향을

다시 그에게 환원하고 싶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눈으로 보면, 이 욕망은 ‘개인적 센스’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은 사적인 기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가 몸에 새긴 질서다. 우리가 “내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들상당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자라온 환경, 익숙해진 언어, 몸에 밴 시간 사용법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들어진 **아비투스(habitus)**의 결과다. 그래서 누군가의 취향을 훔치고 싶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물건을 탐하는 게 아니라 그가 속한 세계의 문턱을 탐하는 일이다.



1. 취향은 ‘센스’가 아니라 아비투스 ― 몸에 새겨진 사회


부르디외에게 취향은 “잘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무엇을 어색해하는지 결정하는 몸의 습관이다. 어떤 음악이 편안하고, 어떤 식당이 부담스럽고, 어떤 옷이 ‘나답다’고 느껴지는 감각은 생각보다 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내 몸이 익혀온 계급적 경험의 축적이다.


그래서 내가 그의 취향을 훔치고 싶어질 때, 나는 단지 음악 리스트나 브랜드를 훔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그 취향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작동하는 방식—말투, 표정, 테이블 매너, 주저하지 않는 선택—그 모든 자연스러움의 기술을 탐낸다. 취향은 결국 몸이다.


• 취향은 사적 선택이 아니라 아비투스(몸의 습관)

• “자연스럽다”는 감각은 사회적 훈련의 결과

• 취향을 훔친다는 건, 사실 몸의 문법을 훔치는 일



2. 문화자본 ― 취향은 ‘좋음’이 아니라 ‘자격’처럼 작동한다


부르디외는 취향을 통해 계급이 재생산된다고 본다. 취향은 삶을 즐기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누가 어떤 공간에 편안히 들어갈 수 있는지 가르는 자격증처럼 기능한다. 어떤 취향은 문을 연다. 어떤 취향은 문 앞에서 나를 멈추게 한다. 그래서 취향은 즐거움만이 아니라, 은근한 불안도 함께 데리고 온다.


나는 그의 취향을 따라 하며 그 세계에 진입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좋아함’은 ‘검열’로 바뀐다. 내가 좋아해서 선택하는 건지, “그럴 듯해 보이기 위해” 선택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취향은 나를 표현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나를 심사하는 기준이 된다.


• 취향은 취미가 아니라 문화자본으로 작동

• 취향은 문을 열기도, 닫기도 하는 사회적 장벽

• 좋아함이 어느 순간 자격/심사의 언어로 변함



3. 구별짓기(distinction) ― “자연스러움”이 가장 강력한 배제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핵심은 ‘구별짓기’다. 지배적인 취향은 자신을 “취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당연함”처럼 행동한다. 가장 세련된 폭력은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거 왜 몰라?”

“그건 좀 촌스럽지 않아?”

이런 말들은 취향의 차이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존재의 등급을 매기는 방식이다.


그래서 내가 그의 취향을 훔쳐 내 안에 새기고 싶다는 욕망은, 은근히 ‘배제되지 않고 싶다’는 욕망과 연결된다. 취향은 관계를 가까이 만드는 것 같지만, 동시에 서열을 만든다. 그리고 그 서열은 종종 말보다 더 정교하게 작동한다.


• 취향은 단순 차이가 아니라 구별짓기(서열화)의 기술

• “자연스러움”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배제의 방식

• 취향의 언어는 종종 사랑보다 먼저 등급을 만든다



4. 상징폭력 ― 내가 스스로를 낮추게 만드는 취향의 힘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폭력은, 누군가가 나를 직접 억압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그 질서를 “옳다”고 믿게 되는 상황이다. 어떤 취향 앞에서 나는 위축되고, 어떤 취향 앞에서 나는 당당해진다. 그 차이는 ‘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공간에서 인정받아왔는지의 역사다.


그래서 그의 취향을 따라 하다 보면 나는 종종 나를 조용히 수정한다. 더 세련돼 보이기 위해, 더 알아보이기 위해, 더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러나 이 과정은 위험하다. 취향이 나를 확장시키는 게 아니라, 나를 검열 가능한 형태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상징폭력은 강요가 아니라 내면화된 인정 욕망으로 작동

• 취향은 나를 넓히기도 하지만, 나를 순치시키기도 함

• 따라함이 어느 순간 자기검열로 바뀔 수 있음



5. 출구 ― ‘훔침’에서 ‘발명’으로: 나의 취향을 되찾는 법


그렇다면 부르디외 이후의 질문은 간단하고도 잔인하다. 나는 정말 그 취향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 취향이 주는 사회적 안정감—“나는 여기 속한다”—를 사랑하는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을 때, 비로소 취향은 장식이 아니라 사유가 된다.


취향을 훔치는 행위가 완전히 나쁜 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배운다. 다만 중요한 건, 훔친 것을 그대로 소유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내 몸에 들어왔을 때 어떤 불편함과 어떤 욕망을일으키는지 읽어내는 것이다. 그때 “훔침”은 모방이 아니라 재료가 된다. 그리고 재료는 결국 발명으로 넘어간다. 나의 취향을 되찾는다는 건, 내가 속한 세계의 문법을 부정하는 게아니라, 그 문법에 나만의 어긋남을 허락하는 일이다.


• 질문: “좋아함”인가, “속하고 싶음”인가

• 훔친 취향을 재료로 삼아, 내 리듬으로 편곡하기

• 취향의 계급을 인식한 뒤, 그 위에 나의 차이를 발명하기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