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주는 정체성
웨스는 짧지만 에드나와 셰프의 집에서 살았다. 둘은 이미 성인이 된 딸과 아들을 둔 부부지만, 웨스의 알코올문제가 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에드나와의 결합이 주는 안정감도 영향을 미쳤는지, 웨스는 그곳에서 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셰프가 자신의 딸을 위해 집을 비워달라고 요청했다. 웨스는 그 소식을 듣고 매우 낙심했고, 에드나는 그를 격려하면서 다른 곳에 집을 얻자고 말했다. 하지만 웨스는 셰프의 집에서 떠나기 싫어했다.
웨스에게 평온함과 안정감, 또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셰프의 집은 소중해 보였다. 더욱이 에드나와도 그곳에서 오랜만에 서로를 이해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떠나 달라는 셰프의 말은 더없이 매정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어떤 장소나 공간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그곳의 외양이나 배경이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 웨스에게 그곳이 계속 머물고 싶은 장소인 건 당연하다. 어느 때보다 인간적이고 변화하는 자신을 보았고 행복한 순간들이 쌓이고 있었으니까.
웨스는 에드나에게 자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라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웨스의 이 한 마디에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는 먼저 자신은 원래 술 문제가 있는 중독자라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그렇기에 지금의 상태에서 더 변화되기 어려운, 즉 고정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장소나 공간에서 잘 풀리면 그곳에 계속해서 머물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은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장소나 공간이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웨스의 마음은 십분 이해되는 일이다. 웨스처럼 공간의 변화를 싫어하고 꺼리는 이가 있는 반면, 공간의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마 후자의 유형은 자아가 좀 더 유연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인가 하는 질문이 귓가에 맴돌고 있다.